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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태경 Jul 14. 2023

쓸만한 시계는 쓸 만큼만

마이크로브랜드 로리에의 넵튠 길트(lorierwatches)


쓸만한 시계는 쓸 만큼만




"대체 시계가 시간만 잘 맞으면 되지, 너는 뭐가 문제냐"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나는 내 전애인이 해준 그 소중한 말을 귓등으로 듣고 다시금 구글에 검색하기 시작했다. "is 6R35 Movement holder steel or plastic…"


시계를 살 거라면, 그래, 누구나 자신의 시계가 쓸만하길 바란다. 비록 나는 손목 위에 올릴 시계가 이미 차고 넘쳐서, 죽을 때까지 저 좀스런 시계 중 하나의 수명이 다할 때까지 쓸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어쨌든 새 시계를 사고 싶고 그 시계를 찾을 때는 먼저 이것이 쓸만한 것인지 따진다.


그렇다면 자연스레 다음의 질문이 따라온다:쓸만하다의 기준이 무엇인가. 당연하겠지만, 그건 사람마다 매우 다를 것이다. 누군가에게 그것은 디자인이 예쁘고 무난하여 어느 상황에서도 나의 패션과 적절히 조응할 수 있는지 일 것이고, 누군가에게는 적당히 쓸만한 부품으로 제작되고 조립되어 30년이 지난 뒤에도 별 무리 없이 새 시계처럼 수리할 수 있는지가 될 것이다. 지금 나의 예산에 맞는 수준에서 적당한 브랜드면 괜찮을 수도 있다. 혹은 조금 험한 상황에서 일을 하거나 생활을 해야 해서 내 손목 위 시계의 내구성이 중요할 수도 있다. 일반인이라면 위의 요소 중 하나가 중요할 것이고, 중증의 시계 애호가는 저 모든 게 다 중요하다.


세상에 그런 시계는 없다. 동묘시장에서 싼 값에 산 시계가 알고 보니 유명한 브랜드의 단 1개 남은 한정판 시계가 아닌 이상, 그런 시계는 없다. 그러니 시계인은 저 요소들 중에서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취사선택하게 된다.


위의 요소들을 모두 만족시킬 수 없다면 가장 쉬운 건, 브랜드를 버리는 것이다. 내 시계가 듣도 보도 못한 잡스러움을 갖고 있어도 좋다. 그것이 예쁘고 튼튼하기만 하다면 내가 평생 아껴줄 수 있다고 약속할 수 있다. 물론 같이 샤워도 하고 밥도 먹고 잠도 잤음에도 결국 중고거래에 반토막도 안 되는 가격으로 올라가겠지만, 그래도 예쁘고 튼튼하다면 브랜드는 상관이 없다. 그러니 흔히 알고 있는 메이저 시계 브랜드 외에 마이너 한 브랜드, '마이크로브랜드'의 시계를 찾아다닌다. 이러한 시계는 대개 같은 가격대의 스위스 메이저 브랜드 제품보다 비슷하거나 혹은 더 높은 옵션을 제공한다. 디자인도 수백만 원대부터 수억 원대 시계까지 다양하다. 자신 제품의 외관뿐만 아니라 기계식 시계의 태엽통, 즉 무브먼트까지 직접 만드는 고가의 시계회사와 달리, 시중에서 많이 쓰이는 범용 무브먼트를 써서 사설수리에도 용이하다. 더군다나 가격도 크게 무리가 되지 않으므로 손쉽게 구매 결심을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문제는 이런 시계가 아니다. 이런 시계를 이미 '데일리', '전투용' 같은 이름으로 수십 개를 사놓고도 '이건 꼭 사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는 태도에 달려있다. 누군가의 손목이 원하는 수요는 시계 하나인데, 시계함에 놓인 '쓸만한 시계'는 넘쳐나서, 누군가와 그의 통장은 대공황에 빠진다. 이 시계도 사랑해주어야 할 것 같고, 저 시계도 사랑해주어야 할 것 같다. 그러니 나중엔 휴대용 시계 보관함을 갖고 다니며 두 시간마다 시계를 바꿔 찬다. '데일리'라는 말은 분명 매일 찰만큼 제품이 적당하고 좋다는 뜻인데 나중에는 그 '매일'이 부족할 지경이다. 나중에 이것을 다시 되팔고자 할 때는 이미 나와 같은 사람들이 '사장님이 미쳤어요', '회사가 망했어요'식의 멘트를 치며 생활 기스 약간, 거의 민트급 제품을 최저가로 팔고 있기 때문에 제 값 받기도 힘들다.


이런 쓸만한 시계가 범람하는 가운데에도 유독 시계인이 고집하는 몇 가지 요소가 있다. 첫째는 내구성 혹은 방수능력이다. 배터리 시계와는 달리 기계식 시계는 충격에도 취약하고 고장이 나기도 쉬우며 수리비도 비싸다. 그리고 가격도 비싼 아이러니도 갖고 있다. 그러므로 시계의 내구성은 많은 이들이 마이크로브랜드에 기대하는 항목인데, 그런 내구성을 나타내주는 지표 중 하나가 바로 방수성능이다.


국제표준화기구(the International Organization for Standardization, ISO) 22810를 따라 시계 제작자는 자신의 시계에 최소 30m의 기압부터 50m, 100m, 150m, 200m 등으로 방수성능을 기입할 수 있다. 여기서 미터 단위는 수심이 아닌 기압(ATM)을 나타내는 것으로, 30m나 50m는 대개 손을 씻거나 비를 맞는 등의 생활방수, 100m는 샤워나 거칠지 않은 수영 정도에 적합하다. 일반인이라면 그렇구나 할 것이다. 그러나 중증의 시계인에게 이 방수성능은 무슨 시계의 내구성 지표처럼 여겨진다. 우리는 갑자기 피치 못할 사정으로 600m 이상의 기압이 짓누르는 수심에 들어가 포화잠수를 해야 하거나, 예기치 못한 이유로 아마존 열대우림에 고립되어 한 달 이상 머물러야 할 수도 있지 않나 하고 걱정한다. 그렇지 않더라도 포탄이 빗발치는 참호 속에서 지금이 몇 시인지 궁금할 수도 있다. 그때 내 시계가 좀 쓸만했으면 좋겠다. 아니, 막말로 출근했는데 갑자기 저녁에 스킨스쿠버를 할 수 있지도 않은가? 그때 모양 빠지게 내 시계를 풀어놓느니 차고 있는 게 더 멋지지 않겠는가? 이래도 시계의 방수성능을 따지는 일이 좀스러워 보이는가?


그래서 그런지, 나는 참 방수성능이 높고 쓸만한 시계가 많았다. 그러나 중요한 건 쓸만한 시계는 쓸 만큼만 있을 때 좋다는 것이다. 대개는 그렇지 못하다. 나도 여전히 시계함을 최대한 많이 비우고 비우는 과정을 거치고 있고, 지금은 그나마 나의 알짜배기들만이라고 할 수 있는 시계들만 남겨놓았다. 그래도 두 자릿수가 넘어가니까 아직 갈 길이 멀다. 설레지 않으면 버리라 했다. 그렇지만 설레는걸, 힝.




여전히 나는 쓸만한 시계를 찾는다. 괜히 새로 나온 마이크로브랜드 시계의 성능을 국 드시는 시아버지 마냥 꼼꼼히 따져보기도 하고, 내가 오늘 차고 나갈 시계가 나의 하루에 쓸만할지 따진다. 이런 피곤한 생활이 나는 참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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