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고거래는 넉넉지 않은 예산을 가진 시계인들이 반드시 거쳐가는 과정이자, 시계 생활의 꽃이라고 할 수 있다. 아껴 쓰고 나눠 쓰고 바꿔 쓰고 다시 쓰는 이런 행태는 가격 방어가 잘 되지 않는다는 시계의 제품 특성에서 기인한다. 시계와 재테크를 섞은 시테크라는 말이 유행하기도 했으나, 이것은 일부러 생산수량을 조절하는 롤렉스나 일부 빈티지, 혹은 한정판 시계에 해당되는 것이고 대부분은 스마트폰과 비슷하다. 사자마자 값어치가 반토막 나는 걸 감안한다면, 누구나 제값 주고 사느니 남이 조금 쓴 거 싸게 사는 게 괜찮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온라인 중고 시장에서 예산이 허락만 한다면, 평소 갖고 싶던 시계를 나쁘지 않은 조건 속에서 득템 할 수도 있었다.
문제는 그런 온라인 중고 시장의 특성에서도 기인한다. 이곳은 내가 평소 눈여겨보지 못할 만큼 비쌌던 시계가 눈물의 급처를 당하는 매력적인 곳이지만, 무엇보다 이 거래를 특징짓는 것은 다음과 같다: 오직 단 1개의 한정수량. 이 가격에, 이 조건에, 이 시계가 올라온다고? 근데 그게 단 1명만이 누릴 수 있는 특혜라면 사람 눈이 돌아가는 것이다. 아니, 잠깐! 혹시 사기면 어떡해? 그러거나 말거나 내가 지금 사지 않으면 다른 놈이 채가는 건 시간문제이므로 일단 질러보게 되는 것이다. 계좌번호랑 전화번호 받으면 그때 더치트(The cheat, 사기이력조회 서비스) 검색해 봐도 늦지 않을 테지. 좀스런 가격대의 시계가 거래되는 온라인 중고 거래는 정글이다.
이렇듯 오로지 시간과 가격만이 지배할 것만 같은 플랫폼에서도 조금이라도 더 우위를 차지하기 위한 전술이 발전한다. 대체 누구로부터의 우위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시계인은 그 우위를 달성하고자 한다. 그 방법 중 하나가 바로 '싸게 싸게'다.
그러니 일단 시계의 가격부터 후려치고 본다. 당신이 물건을 판매하는 시계인이라면 이런 행태가 매우 무례하게 느껴지겠지만, 당신이 반대의 입장이라면 그 이전의 기억은 잊고 일단 나도 한 번 던져보게 되는 것이다. 뭐 이런 과정을 고상하게 표현하겠답시고 우리는 네고시에이션(negotiation, 협상) 같은 말을 쓰지만, 실상 이건 '네고'라는 축약어만큼이나 쌈마이스런 과정이다. 에이, 좀 깎아주라. 뭐, 안되면 안 되는 거고, 되면 좋은 거고, 그치?
가격하니까 생각난 건데, 거의 모든 중고거래자를 포함해 시계인들 또한 이상한 계산식을 갖고 있다. 예를 들어, 평소 별로 눈여겨보지 않던 시계가 무려 20만 원이나 저렴한 가격에 올라왔다. 이때 일반인이라면 평소에 관심두지 않던 물건이기에 그것을 사지 않고 돈을 굳힐 것이다. 그러나 시계인은 다르다. 이것을 사지 않는다는 것은 미래의 20만 원을 잃는 손해인 것이다. 이들에겐 지금 지불해야 할 시계의 금액보다 있지도 않은 미래의 20만 원이 더 중요하게 느껴진다. 따라서 산다. 물론 이것을 20만 원을 다시 붙여서 되판다면 이익이겠으나, 신성한 중고거래에서 되팔이를 하다 걸릴 경우엔 흠씬 두들겨 맞고 장터에서 쫓겨날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무엇보다 왜 이 시계가 평소보다 20만 원이나 저렴하게 올라온 것인지를 생각해 볼 필요도 있다. 싼 것은 다 이유가 있다. 어떻게 아냐고? 저도 알고 싶지 않았어요.
어쨌든 우당탕탕 과정을 거쳐서 값을 다 치렀다면 이제 우리는 택배를 기다린다. 특히 시계인에게 이 부분은 민감한데, 태엽으로 움직이는 기계식 시계는 그 가격에 어울리지 않게 충격에 매우 취약하기 때문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판매자가 내 시계를 에어캡으로 이중삼중 보안하여 포장했는지, 아니면 대충 락앤락 지퍼백에 담아서 신문지에 싸서 보내는지는 중요하다.
직거래를 했을 경우에는 이 과정을 쉽게 스킵할 수 있다. 시계가 아무리 좀스러워도 가격대가 고만고만하지 않은 경우는 왕왕 있다(시계인들이 100만 원 안팎의 시계를 무엇이라 부르는지 아는가? '합리적인 가격대'라고 부른다). 직거래는 무엇보다 자신이 구매하고자 하는 시계를 직접 확인할 수도 있고 택배상자에 담긴 시계 대신 벽돌을 볼 확률도 없애준다. 그러나 문제는 항상 내가 원하는 물건을 가진 이가 나랑 가까이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KTX를 타고 전국을 누빌 생각을 하지 않는 이상, 기차표 보다 저렴한 택배비를 내고 시계가 잘 도착하길 바라는 수밖에.
다음날 정도가 되면 판매자에게서 두근거리는 문자를 받게 된다. 바로 택배 송장번호가 적힌 영수증 사진이다. 이제부터 시계인은 하루 혹은 이틀 정도 인고의 시간을 견딘다. 오늘 비가 내린다던데, 혹시 택배 기사님이 운전하시는 차가 전복되어서 내 시계가 유실되면 어떡하지? 혹시 오늘 택배 상하차 도중에 내가 받을 상자가 유실되면 어떡하지? 설마 그럴리는 없겠지만, 기사님이 택배 상자를 들고 도망가시면 어떡하지? 대한민국의 물류체계는 정말 기가 막힐 정도로 체계적이고, 빠르며, 그 시스템 속에서 노동해 주시는 모든 분들의 노고에 나는 감사한다. 그러나 저런 생각을 안 한 건 아니며 모든 것은 저의 편집증 때문입니다. 죄송합니다.
한 시간에 한 번씩 포털 사이트에 '택배조회' 따위를 검색하면서 '하차', '물류센터', '발송' 등의 단어에 일희일비하다 보면 어느새 띵동, 문자가 온다. 바로 오늘 몇 시 몇 시 사이에 택배가 도착한다는 기사님의 문자이다.
이렇게 구매의 다사다난한 하나의 페이즈가 막을 내린다. 하지만 시계인에게 구매는 중고거래의 한쪽면이다. 빠질 수 없는 또 하나, 바로 시계 판매이다. 이게 또 재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