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의 깨달음: 내가 페미니즘(feminism)을 하고 있는 이유는 단순히 ‘여자가 좋아서'라는 것.
예전부터 내가 나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혹은 페미니스트를 지향한다고 소개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묻곤 했다: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어쩌다가 페미니즘을 접하신 거예요?
나는 저 ‘어쩌다가’ 혹은 ‘어떻게'라는 말이 항상 재밌다고 생각했다. 그렇죠, 일반적인 삶의 경로는 아니긴 하죠. 하지만 페미니스트로 살기를 결심한 많은 이들이 그렇듯, 페미니즘은 우리의 미래의 삶에 뗄 수 없는 이정표가 되었다.
나는 ‘어쩌다가'에 대한 질문에 대해 항상 같은 레퍼토리의 답변을 갖고 있었다. 실제로 내가 대학교 2학년이던 2015년 여름, 같은 동아리의 김선배가 내게 ‘페미니즘'을 공부하자고 했고 나는 그때부터 페미니즘의 지식에 빠져들었다. 무엇보다 나 자신이 나 스스로를 '남성'으로 느끼고 있으며 여기에 편안해한다는 것, 내가 ‘남성'으로서 하는 행동들이 어떻게 여성혐오, 성차별과 연결될 수 있는지에 대한 논리들. 나는 페미니즘을 만나고 처음으로 나의 ‘젠더(gender)'의 렌즈로 나의 삶과 나의 몸을 다시 바라볼 수 있었다. 새로운 시각이 주는 감각은 낯선 만큼이나 나를 사로잡았다.
페미니즘이 남성인 나의 언어이기도 하고, 여성혐오가 남성인 나의 삶과 직결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은 뒤부터 나는 이 지식에 풍덩 빠졌다.
하지만 그로부터 햇수로 9년이 지난 지금, 틴더(tinder)나 돌리고 있는 내가 문득 깨달은 것은, 사실 나의 페미니즘은 위의 레퍼토리만큼 거창하지는 않다는 것이다. 결국 근본적인 앎의 욕구는 단순했다. 나는 여자를 너무 좋아했다. 근데 왜 여자를 너무 좋아하는지, 그게 왜 나를 힘들게 하는지가 궁금했다. 그러니까 나의 페미니즘 지식의 중점은 남성이라는 나의 ‘젠더'가 아니라, ‘섹슈얼리티(sexuality)’에 좀 더 기울어져 있었다.
이성애(heterosexuality)는 항상 나에게 트러블이었다. 성(sex)에 대한 관심이 생겨나던 중학생 무렵부터 ‘왜 나는 여친이 생기지 않지'를 고민한 나는 대학생이 되어서도 같은 고민을 갖고 있었고, 이러한 결핍은 곧 나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나는 이러한 알 수 없는 피로와 우울에 찌들어 있었는데, 마침 김선배의 제안이 나에게는 딱 들어맞았던 것이다. 우울과 불안으로 가득 찬 풍선이 아주 작은 바늘로 톡 터져버렸다.
사실 이러한 최근의 깨달음을 누구에게 얘기해 본 적은 없다. 왜 페미니즘을 하게 됐냐는 질문에 ‘여자가 좋아서요.’하고 대답한다면 상대방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충분히 예상이 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깨달음이 나를 설명하는 정확성을 부정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나는 이 글을 써야 했다. 그 정확성이란, 나는 여자가 너무 좋고, 그래서 여자를 너무 좋아하는 게 무슨 의미일 수 있는지, 어떤 결과를 만들 수 있는지를 고민한다는 것이다. 틴더남과 남페미의 교집합 속에서 시시하고 느긋하게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