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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낙타 Aug 26. 2024

위대한 개즈비

<차이에서 배워라(창비, 2023년. 원제: Ten Steps to Nanette: A Memoir Situation)>


태즈메이니아라는 작은 섬에서 엉뚱한 소녀로 자란 해나 개즈비(hannah gadsby)는 크게 이렇다 할 것 없는 삶을 살다가 우연히 스탠드업 코미디 대회에 나가 상을 타면서, 그의 스탠드업 코미디언으로서 경력을 시작하게 된다. 본토에서 떨어진 외딴섬, 다정하면서 괴팍한 가족과 이웃들, 언제나 사람들과의 관계가 서툰 이 인물의 성공담은 어떤 모습일까? 이런 질문을 가진 독자를 위해 개즈비는 친절하게 자서전 내용을 설명해 준다.


“... 내 이야기를 밑바닥 인생에서 시작해 성공한 유명인이 되었다는 감동 포르노 서사로 읽어주지 않길 바란다. 사실이 그렇지 않아서다.”


넷플릭스에서 처음 개즈비의 <나의 이야기(원제: Nanette, 2018)>를 보았을 때 느꼈던 전율을 잊을 수 없다. 스탠드업 코미디를 잘 알지 못하지만, 적어도 이 쇼는 내가 앞으로 가장 좋아할 스탠드업 코미디가 될 것이라는 직감이 들었다. 2024년인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


2023년, 한국에 개즈비의 자서전 <차이에서 배워라(창비, 2023년. 원제: Ten Steps to Nanette: A Memoir Situation)>가 출간되었다. 정직한 원제처럼 책은 오스트레일리아의 태즈메이니아에서 자란 꼬마 개즈비가 <나의 이야기>라는 쇼까지 오게 되었는지, 그 이후에는 어떤 이야기가 있는지를 다룬다. 스탠드업 코미디만큼이나 문장이 하나같이 웃겨서, 적어도 이 자서전만큼은 대필 작가가 없거나 혹은 개즈비만큼 뛰어난 대필 작가를 쓴 거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책을 읽는 내내 육성으로 웃은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나는 그 무엇보다 한 사람과의 특별한 관계를 원했다.”


책을 읽으면서 밑줄 친 부분이 참 많았는데, 무엇보다 개즈비가 다른 사람과 갖는 서툰 모습이 지독하게 마음에 와닿았다. 오스트레일리아 본토에서 떨어진 태즈메이니아 출신 레즈비언 저자와 한국 서울에 거주하고 있는 이성애자 남성이 얼마나 이어질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방적인 관계라도 나는 개즈비의 글을 한 문장씩 천천히 삼킬 수밖에 없었다. 아, 이건 나를 위한 문장이네. 이건 나를 위한 표현이고.


“그러면 저는 관계에 왜 이렇게 서툴까요?”


어떤 책이 꼭 나를 위한 책으로 느껴질 때가 있었다. 나를 위한 단어, 나를 위한 문장, 나를 위한 앎처럼 느껴질 때가 그랬다. 그럴 때면 내가 읽은 책과 이 책을 만나게 해 준 운명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는데, 개즈비의 책이 딱 그랬다. 한국어판 제목 <차이에서 배워라>은 그다지 적절하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나는 진짜, 정말로 내 사람들을 사랑한다. 사람들을 싫어하는 게 전혀 아니다. 그저 사람을 사귀거나 대하는 것이 정말 지치고 어렵고 아무리 노력해도 더 나아지는 것 같지 않다는 점이 문제다. 그리고 절대로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은 ‘만성적인 공허감’이었다. 가끔은 희망이 없이 느껴지긴 하지만 한 번도 공허했던 적은 없었다. 실은 내 안에 너무 많은 것이 있어서 문제였다.”


저기, 개즈비 씨, 당신과 이름이 비슷한 북아메리카의 어떤 장교 양반은 사랑을 위해 과거를 통째로 바꾸려고 했고, 그 모습을 지켜본 친구에 의해 ‘위대하다’라는 수식어까지 얻었어요. 내가 당신에게 ‘위대하다’라는 수식어를 붙인다면 그건, 역시 이름이 비슷하다는 이유가 가장 크겠지만, 꼭 그것만은 아니에요. 끝없는 질문에도 불구하고 계속 애를 쓰는 그 모습 때문이에요. 나 또한 그렇기 때문에, 서로에게 위대하다(great)는 말을 붙여주고 싶은 거예요. 나는 적어도 당신의 글을 읽으면서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실감했답니다. 당신이 쓴 <나의 이야기>도 재밌게 봤고, <나의 더글러스(원제: Douglas)>, <썸씽 스페셜(원제: Something Special)>도 무척이나 재밌게 봤어요. <나의 이야기>와 다르게 웃기려고 작정한 다른 두 작품은, 정말 보면서 깔깔 웃었습니다. 그중에서도 <나의 더글러스>를 저는 가장 좋아해요!


저기, 개즈비 씨. 당신이 그랬죠. 위험한 분노로 이어가지 않고, 웃음으로 억지로 봉합하지 않은 채로,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요. 너무나 오랫동안 코미디를 하면서 웃음으로 넘겨버린, 치유되지 않은 이야기를 시작하려 한다고요. 제가 그 코미디를 본 게 벌써 6년 전입니다. 그리고 저는 여전히 6년 전의 낡은 코미디를 돌려 보면서 힘을 얻고 있어요. 그런 점에서, 아주 감사합니다.




개즈비의 자서전 <차이에서 배워라>는 하여간 엄청 웃긴 책이다. 개즈비의 넷플릭스(Netflix) 시리즈인 <나의 이야기>, <나의 더글러스>, <썸씽 스페셜>도 엄청 웃기다. 시간 내서 볼만한 가치가 있다고 소리 높여 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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