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해로운 삶
이따금씩 휘몰아치는 슬픔이라는 감정에 대해 나는, 이것들과 어떻게 마주하고 정리해야 할지 몰라 곤욕스러울 때가 있다. 살면서 그런 날들은 정말 갑자기, 불현듯, 돌연히 출몰한다. 오늘처럼.
사실 슬픔 따위를 소환할 이유는 없었다. 못난 찌질함이 발동했다. 끝없는 우주의 블랙홀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성난 파도가 단숨에 집어삼키듯 요란한 마음이었다.
나의 이런 요란한 마음은 분노라는 날것의 감정으로 나타났다가 이내 모습을 숨기고 슬픔으로 귀결된다.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부정적 정서의 끝에서는 늘 슬픔으로 귀결되는 나. 나는 왜 이토록 슬퍼하는 걸까?
나는 매우 자주 습관적으로 연민과 슬픔의 감정을 오간다. 저마다의 크고 작은 아픔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과 주인의 사랑만을 애타게 좇는 반려 동물들의 삶 그리고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아 메말라가는 꽃과 나무를 볼 때면 시시때때로 때로는 지나칠 만큼 연민과 슬픔에 몰입된다.
스피노자는 그의 저서 <에티카>에서 연민과 슬픔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연민이란 우리들과 비슷하다고 우리가 표상하는 타인에게 일어난 해악의 관념을 동반하는 슬픔이다.
슬픔은 인간의 더 큰 완전성에서 더 작은 완전성으로 이행하는 것이다.
결국 연민 역시 슬픔과 같은 맥락의 감정이다. 공부를 하는 이유도 결국 어느 누구도 소외됨이 없이 평등한 교육의 기회를 바라는 마음에서 시작되었다. 이러한 나의 슬픔들은 때로는 나를 움직인다.
요란했던 나의 마음은 분노로 시작해 슬픔과 연민으로 귀결되었지만, 또 한 번 나를 움직였다. 슬픔을 이해하고 연민을 다독이는 과정에서 나의 욕심이었음을 받아들이게 되었고 마음을 추스를 수 있었다.
스피노자는 슬픔을 인간의 더 큰 완전성에서 더 작은 완전성으로 이행하는 것이라고 했으나 이러한 과정 안에는 성찰이 있고 이는 온전한 인간으로 거듭날 수 있는 매개가 된다.
때로는 슬픔과 연민이 아픔이 되기도 하지만 이러한 아픔은 타인을 이해하고 포용하는 불쏘시개가 된다.
나의 슬픔에 대하여, 용기를 내본다.
함께 읽으면 좋은 책
루시 롤랜드 저, <작은 점 하나>
작은 친절로 인해 달라지는 세상. 친절이의 포용할 수 있는 용기
세상을 바꾸는 힘은 결국 포용성. 그렇게 세상은 조금씩 변화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