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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희정 Dec 27. 2018

아빠는 '아빠'라는 말이 가장 익숙한 사람

아빠의 세 번째 보청기

아빠는 몇 달 전 청각장애 4급 판정을 받으셨다.

    

이 세상에 더한 고통과 장애들이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훨씬 많겠지만, 1급도 아니고 2급도 아니고 4급이었지만 ‘장애’라는 그 한 단어에 가슴이 쿵 했다. 몇 년 전부터 귀가 잘 안 들리기 시작했고 대화가 잘 안됐다. 아빠의 목소리는 점점 커졌고 혼자 말하는 횟수와 침묵하는 횟수는 대화하는 횟수보다 훨씬 많았다.     




첫 번 째 보청기는 시장에 가다 길거리에서 산 저렴한 보청기였다. 아빠는 어느 날 혼자 시장 구경을 하다 보청기를 덥석 사 왔는데, 다른 것도 아니고 자신의 귀를 대신할 물건인데 오직 싸다는 이유 하나로 구매가 결정됐다. 아빠는 항상 싸다고 느껴질 때만 지갑을 연다. 역시나 귀에 잘 맞지 않았고 성능도 좋지 않았다. 얼마 못가 그 보청기는 귀가 아닌 서랍 속에 넣어졌다.     


두 번째 보청기는 엄마와 함께 보청기 매장에서 구매하셨다. 100만 원이 넘는 금액 앞에서 아빠는 여러 번을 망설이셨고, 그 이야기를 엄마를 통해 전해 들었다.      


“보청기가 비싸서... 니 아빠가 살까 말까 한다.”    

 

아빠는 비싸다고 느껴질 땐 지갑을 열지 않는다. 엄마에게 용돈을 보내드렸고, 딸의 용돈으로 아빠의 망설임은 끝나는 듯했다. 그렇게 어렵게 구매한 보청기를 잘 끼고 다니시는 듯했으나 이내 얼마 안 가 엄마에게 다시 전화가 왔다.     


“잃어버렸 단다! 어디서 잃어버렸는지도 모른 단다! 아이고 내가 못살아...”     

 

아빠의 망설임은 구매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잃어버리고 나서도 얼마나 많이 망설이셨을까. 미안한 마음에 딸내미에게 말도 못 하고 그렇게 아빠는 다시 적막 속에서 침묵했다.     


시간이 갈수록 잘 안 들리는 것도 문제였지만, 갈수록 심해지는 귓속 염증 때문에 큰 병원에서 치료를 받기 시작했고, 의사는 이 정도면 장애판정을 받을 것 같다며 검사를 해보자고 했다. 그렇게 청각장애 4급. 아빠에게 또 하나의 신분증이 생겼다.     



아빠는 오히려 좋아했다. 보조금이 나온다며 본인의 귀 보다 딸의 지갑을 걱정하셨다. 그렇게 장애등급을 받고서야 제대로 된 보청기가 아빠의 귀에 꽂혔다. 아빠는 장애보다 딸에게 주는 부담이 더 두려 우셨을까? 장애판정을 받고도 잘 됐다 말하시는 아빠를 보니 가슴이 콕콕 아렸다.     


보청기를 맞춘 날. 직원은 아빠에게 열심히 사용법을 설명했다. 어떻게 착용하는지, 보관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하지만 아빠는 이해와 손짓이 느렸다. 두껍고 무딘 손으로 보청기의 건전지 하나 제대로 빼지 못했고 아무리 설명을 해 드려도 헷갈려하셨다.      


“아버님! 다시 착용해 보세요!”


직원의 말이 계속 반복됐다. 보고 있자니 답답한 마음과, 짠한 마음과, 직원에게도 미안한 마음이 동시에 올라와 나는 한숨만 푹푹 쉬었다. 그런데도 그 직원은 천천히 크게 설명을 반복해 주었고, 엄마에게도 당부를 잊지 않았다.     


“어머님! 보청기가 있다고 무조건 바로 대화가 잘 되는 건 아니에요. 이야기할 때는 꼭 아빠!라고 먼저 불러야 해요. 아버님은 아빠라는 말이 가장 익숙하고 먼저 반응하니까, 설거지하다가 아버님 보고 대뜸 ‘그릇 좀 갖다 줘!’ 하면 안 돼요. 먼저 ‘아빠!’하고 부르고, 그다음 ‘그릇 좀 갖다 줘’하셔야 해요.”     


“아버님! 이제 사람들하고 얘기할 때는 눈을 보고 보청기 낀 귀를 가까이 대고 집중해서 들으셔야 해요. 아셨죠?”     


엄마와 아빠는 어린아이처럼 눈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20년을 넘게 같이 산 자식인 나도 내 부모의 말을 답답해하고 고개를 돌리는데, 귀가 잘 들리지 않는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을 저 직원은 이렇게나 친절하게 그리고 정확하게 설명을 해 주다니. 누가 자식이고 누가 직원인지 나조차 구분이 안 갔다.    

 

“아 그리고 어머님! 이제 아버님은 저녁에 많이 피곤 해 하실 거예요. 보청기 끼시는 분들은 집중해서 말을 들어야 하기 때문에 남들보다 더 피곤해요. 집중하면 피곤하거든요. 어머님이 이해해 주셔야 해요.”     


그 이해는 딸인 나도 하지 못한 것이었다.     




집에 돌아오는 내내 보청기 직원의 말이 내 귓속에 멤 돌았다. 보청기는 아빠가 아닌 내가 낀 것 같았다. 대화할 때는 아빠라고 먼저 부르라는 말, 아빠의 피곤을 이해하라는 말. 그 두말이 유독 크게 들렸다. 그건 바로 내가 새겨야 할 문장 들이었다.      


아빠가 장애가 있는 건 슬픈 일이 아니다. 다만 조금의 품이 드는 일이다. 아빠도 그리고 엄마와 나에게도. 이제 그 품을 잘 들여서 서로의 말을 조금 더 잘 들어주면 될 일이다. 조금 더 이해해 주면 될 일이다. 원래 ‘이해’는 시간이 드는 일 이라, 하려면 먼저 기다려 줘야 한다. 내가 아빠의 말을 잘 들어주는 것 만큼이나 중요한 건 아빠를, 아빠의 말을 그리고 대답을 기다려 주는 것이다. 아빠가 보청기를 세 번 맞추는 동안 나는 이해는 기다림 이라는 것을 배웠다.


세 번째 보청기는 아주 잘 맞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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