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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희정 Sep 01. 2023

엄마를 구원하는 것들

혼영, 낮술 그리고 집안일 ‘안’ 하기

   


해피 엔딩인지 아닌지는 어디서 이야기를 끊느냐에 달려 있다.


《살림비용》- 데버라 리비     




오늘 나의 미션은 아이 등원과 하원 사이 영화 한 편을 보는 일이다. 영화 한 편 보는 게 미션까지 될 일인가 싶지만, 아이가 있는 삶에 책과 영화, 글쓰기와 사유가 얼마나 애써야 할 수 있는 일인지 나 또한 엄마가 되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며칠 전 내가 좋아하는 시인의 시로 만들어진 독립영화가 개봉한다는 걸 알고 나는 이 미션을 계획했다. 개봉 전날 집 근처와 회사 근처 극장을 열심히 검색했다. 하지만 독립영화의 특성상 상영관이 많지 않았고, 시간도 하루 한 타임 정도밖에는 없었다.  

    

다행히 집에서 40분 거리의 극장에 오전 10시 반 타임의 영화가 있었다. 이 한 편의 영화를 보기 위해 평소보다 1시간 일찍 일어나 집안일을 하고, 조금 일찍 아이를 깨워 먹이고 씻기고, 어린이집에 제일 처음으로 맡긴 후 부랴부랴 출발해 상영관으로 들어갔다. 평일 오전과 독립영화가 만나 관객은 다섯 명. 영화를 보는 것도 혼자인 것도 관객이 적은 것도 조용하고 깜깜한 것도 다 좋았다.



영화를 보는 것도 혼자인 것도 관객이 적은 것도 조용하고 깜깜한 것도 다 좋았다.






영화가 끝나고 엔딩크레디트를 마지막까지 다 보고 싶었지만 나에겐 시간이 없었다. 다시 부랴부랴 상영관을 빠져나와 주차장으로 달려가는 길, 순간 옆 카페에서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잔이 너무 마시고 싶었지만 마실 돈이 아니라 시간이 없었으므로 그냥 지나쳐야 했다. 얼른 집으로 돌아가 등원 전쟁의 흔적을 하나하나 치우고 남은 집안일을 하고 씻고 출근을 해야 했다.      


집에 들어가자마자 우선 머리를 감고 거실에 널브러져 있는 기저귀를 돌돌 말아 쓰레기통에 넣고 아이가 등원 전 가지고 놀던 퍼즐을 맞추고 청소기를 돌리고 냄비 두 개를 올려놓고 매운 콩나물국과 슴슴한 콩나물국을 끓이고 옷을 갈아입고 다시 운전대를 잡았다. 너무 피곤해 이렇게까지 해서 영화를 봐야 하는 건가 잠깐 생각했지만, 등원과 하원 사이의 시간을 쪼개고 쪼개 혼자 영화 보기 미션에 성공한 내가 대견했다.


잠과 밥, 화장과 커피와 맞바꾼 영화는 훌륭했고 내 영혼은 충만해진 채로 꾸벅꾸벅 졸았다.   



   





오늘의 미션은 아이를 등원시키고 친구를 만나 낮술을 마시는 일이다. 오늘을 위해 지난주부터 남편에게 부탁했다. 평일 하루 출근하지 말고 아이를 봐 달라고. 나는 친구와 낮술을 마시겠다고. 밤술이 아닌 낮술이기 때문에 늦지 않게 들어올 거지만, 혹시라도 내가 조금 취해 들어올 수 있으니 저녁에도 아이를 좀 봐 달라고. 한 계절 내내 모질게 산후우울증으로 고생한 후 나를 위해 큰맘 먹고 세운 미션이었다. 남편은 흔쾌히 그리고 친절히 나의 낮술을 응원해 주었다.


버스에서 내린 후 걸어서 약속 장소로 가는데 기력과 체력이 달려 보이는 벤치마다 앉아서 쉬었다 가야 했다. 우울증은 나를 엄마가 아닌 할머니로 만들어버린 것 같았다. 만날 친구에게 이 상황을 설명하니 나에게 말한다. “그럴 거면 지팡이를 사라고.” 놀림을 받았는데 이상하게 기분이 좋았다. 낮술과 친구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낮술과 친구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월요일과 낮술이 만나 손님은 두 테이블. 낮에 시원한 맥주를 마시는 것도, 오랜만에 가장 친한 친구와 단둘이 만난 것도, 사람이 적은 것도, 대낮에 내 우울을 추억처럼 이야기하며 울지 않는 것도 다 좋았다. 1차로 피맥을 하고 2차로 마른안주에 생맥주를 마시러 갔다. 가게 앞에 크게 입간판이 세워져 있었다. ‘일찍 마시는 자가 한 잔 더 마신다.’ 우리는 월요일 11시부터 마셨으므로 두 잔 더 마신다. 친구와 즐겁게 마시고 먹고 떠들고 해가 지기 전에 똑바로 걸어 집에 들어갔다. 술은 서두르거나 술자리에 안주와 말이 부족할 때 취하는 거지 느릿느릿 마시고 맛있게 먹고 술잔보다 말이 넘치니 취하지도 않았다.   




대낮에 내 우울을 추억처럼 이야기하며 울지 않는 것도 다 좋았다.

   



집에 도착해 아이 저녁을 먹이고 씻기고 재웠다. 마셨지만 어제와 다르지 않게 아이를 돌본 내가 기특했다. 남편의 하루치 일당과 맞바꾼 낮술은 훌륭했고, 내 영혼은 기쁨으로 가득 찬 채로 아이가 잠든 후 ‘한잔 더’를 외쳤다.     








오늘의 미션은 집안일을 ‘안’ 하는 일이다. 일을 안 하는 게 일이라니. 집 안에 있으면서, 정확히는 너저분한 집 안에 있으면서 그걸 눈 감는다는 건 결코 쉬운 게 아니다. 아직 아이는 스스로 더러운 걸 판단하는 능력이 없어서 내가 치우지 않으면 더러운 건 다 아이 몫이다. 물고 빨고 먹고 또 더럽힐 것이므로, 시도 때도 없이 닦고 정리하고 치워야 했다.


삶이 복잡하니까 집이라도 단순하고 깨끗하길 바랐지만, 아이가 태어나며 삶과 집 모두 혼잡스러워졌다. 그래서 더 열심히 쓸고 닦았다. 쉴 시간에, 다른 일을 해야 할 시간에, 자야 할 시간에, 부단히도. 그래서 나는 집안일을 하다 자주 아팠고 화가 났고 우울해졌다. 집안일은 끝도 없었고 끝도 없이 치워도 끝나지 않았다. 아무리 해도 상쾌함이나 보람 따위 없었다. 지치기만 했다. 보수는 말할 것도 없었다.


청소, 빨래, 밥 하기, 설거지와 같은 집안일들이 힘든 건 그 자체로 힘들다기보다 그걸 무한히 반복해야 한다는 게 힘든 거라는 걸 계속하며 깨달았다. 아침 먹고 나면 점심 준비, 점심 먹고 나면 저녁 준비, 중간에 아이 간식도 챙겨야 하고. 설거지는 삼시세끼 사이사이마다 쌓이고, 세탁기와 건조기도 무한히 돌아가고, 장난감과 아이 용품들은 바닥에 흩뿌려져 있고, 머리카락과 먼지는 숨 쉴 때마다 떨어지고 쌓이는 것 같고. 집 안에서 항상 나는 롤 테이프와 물티슈를 손에 쥐고 있었다.     




 집안일은 끝도 없었고 끝도 없이 치워도 끝나지 않았다




청소를 마친 후 개운할 수 있었던 건 그걸 그래도 며칠은 유지할 수 있어서였다. 아이가 있는 집에서는 불가능했다. 치우자마자 동시에 어질러지는 경험을 매번 해야 하니까. 말끔해졌다는 보람을 느낄 틈이 없었다. 여러 번의 몸살과 시행착오 끝에 이제부터는 다 하려고 하지 말고 큰 것만 대충 급한 대로 하기로 마음먹었다. 대청소는 푹 잔 후 몸이 가벼운 상태에서 주말에 남편과 함께. 집안일은 끝이 없으니까 끝내려고 하면 안 된다. 내가 해야 할 일은 집안일만 있는 게 아니므로 우선순위를 두고 타협을 하고 나를 설득해야 한다. ‘적당히 이것까지만’이라고. 아이를 낳고 일을 쉬었던 시기, 출근을 안 하게 되자 내가 내 집으로 출근해 집안일을 하고 있었다. 매번 미련하게 집안일을 아플 때까지 했다. 끝도 없는 육아와 집안일에 시달려 생의 사직서를 가슴에 품고 다녔다. 엄마도 아내도 주부도 다 그만두고 싶었다. 그만두지 않고 버텨낸 나 대단하다.   


  


육아와 집안일에 시달려 생의 사직서를 가슴에 품고 다녔다.




‘혼영’과 ‘낮술’과 집안일을 포기하고 얻은 ‘내 시간’이 나를 구원했다. 나와 똑같이 육아와 집안일을 나눠 분담해 준 남편이 있어 가능했고, ‘해야지’와 ‘그만해야지’와 ‘해 줘’를 반복해 다짐하고 부탁했기에 수월해질 수 있었다.


‘해피 엔딩인지 아닌지는 어디서 이야기를 끊느냐에 달려 있다’고 했다. 우리는 모두 여기까지만 하고 행복해질 권리가 있다.


오늘의 미션은 여기까지만 쓰고 간장게장에 밥을 비벼 먹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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