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임희정 Aug 25. 2023

분노하며 사랑하고, 대충하며 만족하는 삶

행복과 죄책감 사이



취약성의 아름다움과 한계를 수용하게 해 준 것이야말로 돌봄의 경험이 나에게 준 가장 귀한 선물이다.


-김희진 ‘돌봄과 작업’     




잠에서 막 깬 아이가 작디작은 몸을 힘껏 늘려 기지개를 한 후 “엄마 아침이야!” 하며 내 품에 파고든다. 배 속에 있을 때처럼 내 틈에 웅크려 들어온 아이를 꽉 안고 뽀얗고 통통한 볼에 뽀뽀한 후 어떤 향기와도 비교할 수 없는 아이의 살냄새를 맡는다. 이건 모두 오감으로 느끼는 충만한 행복이다. 빨간색도 아니고 하트모양도 아니지만 선명한 사랑이다.  

    

그런 아이가 아침밥을 안 먹겠다며 투정을 부리고 입에 넣어준 밥을 뱉어버린다. 우유와 식판과 장난감을 다 엎어버리고 양치하기 싫다며 칫솔을 던져버릴 때 내 다섯 종류의 감각은 죄다 하나의 분노로 바뀐다.


“먹지 마!” “하지 마!” 사랑은 순식간에 윽박이 된다. “으앙!” 아이는 왕창 울어버리고. 오늘도 아이에게 화를 내며 내 하루를 시작하는구나. 어젯밤에도 아이에게 성내며 하루를 끝냈던 것 같은데. 아직 제대로 시작도 하지 않은 하루와 종일 수고한 내 하루는 그렇게 매일 망쳐지는 것 같다. 숨이 넘어갈 정도로 꺽꺽 우는 아이를 보며 “엄마가 소리 질러서 미안해.” 사과하고 달래고 인내심 없는 엄마라는 자괴감을 느낀다.   





아직 제대로 시작도 하지 않은 하루와 종일 수고한 내 하루는 그렇게 매일 망쳐지는 것 같다.

  




글 한 줄 쓰고 기저귀를 주문한다. 책 한 장 넘기고 빨래를 돌린다. 잠깐 멍해 있다가 설거지하고, 시계를 보고 옷을 갈아입고 출근을 한다. 몸만 빠져나온 수면 바지는 침대 위에 똬리를 틀고 있고, 다 마시지 못한 커피는 잔에서 식고, 어제 온 택배 상자는 오늘도 문 앞에 있다. 치워야 할 머리카락과 닦아야 할 먼지와 냄새나는 행주가 그대로 있지만 모두 놔두고 현관문을 연다. 이제 나는 일하러 가야 하니까. 집안일하다 집 밖 일 못 하면 안 되니까. 치우지 않았다고 당장 큰일 나는 거 아니니까. 집안일을 무시해야 집 밖으로 나갈 수 있으니까.     

집안일을 하다 내 일을 못하면 화가 나니까 내 일 먼저 하고 시간과 체력이 남아있는 만큼만 집안일하기로 한다. ‘에너지가 조금밖에 없을 땐 적어도 그 에너지를 남과 다른 것에 쓰지 말라’고 했다.   




'이렇게 나는 사라진다' ⓒ미리옹 말르


   




내가 생각하는 엄마에게 너무나도 중요한 관점은 ‘양가감정’을 인정하는 것과 ‘타협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양가감정 인정하기     




아이에게 다정과 닦달을 순식간에 번갈아 가며 쏟아내는 나는 인내심과 애정이 부족하거나 엄마로서 자질이 없는 사람일까. 아이를 언제나 기다려주고 매 순간 무조건 애정을 보내고 모든 걸 사랑으로 감싸 안는 모성. 그건 과연 가능한 걸까? 오히려 인내심이 없는 건 부모가 아니라 아이다. 아이는 기분을 참을 줄 모른다. 아직 배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내는 원래부터 꽉 채워져 있는 성질이 아니라 교육과 경험을 통해 습득하며 보충하는 거다. 내 감정을 필요에 따라 참을 수도 있어야 한다고 의식하는 건 적어도 아이에게는 아직 오지 않은 차례다. 아직 성숙과 사회화가 덜 된 인간에게는 순서와 정도가 없을 수밖에 없다. 그 때문에 아이와 함께면 사랑과 미움, 기쁨과 짜증, 웃음과 울음은 동시에 생겨난다.      


아이로부터 초와 분 단위로 겪는 전혀 다른 감정의 교차. 논리적으로 어긋나는 혼란스러운 감정. 우리는 이 엇갈림과 마주침을 우선 ‘인정’ 해야 한다. 내가 왜 이럴까, 나는 왜 이 모양일까, 자책하며 부정하지 말고 아예 다른 차원의 감정과 대상을 두고 서로 비교하거나 부정하지 않아야 한다. 아이가 밉다고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며, 아이 때문에 짜증이 난다고 아이가 싫은 게 아니다. 우린 알고 있다. ‘나는 내가 좋고 싫고’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고’ 아이 때문에 너무 행복하고 힘들다. 행복과 힘듦은 전혀 다른 감정이며 비교로 정도가 의심되는 것도 아니다.      




아이를 낳지 않았더라도 행복했으리라는 것을 안다. 조금 다른 행복이었을 것이다. 조금 덜 고통스럽고 조금 덜 맹렬한 행복


– 정서경 ‘돌봄과 작업’     




아직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은 아이가 때론 몰라서 잘못을 저지르기도 한다. 그런 일에는 알맞게 혼내고 심하게 사랑해 주면 된다. 아이들은 어른처럼 복잡하지 않고 잘 받아들인다. 그것이 아이가 어른보다 나은 부분이다. 다행이라 생각하고 절충하면 된다. 인정하자. 인간의 감정은 양가적이다. 내 널뛰는 감정을 인정해야 아이의 날뛰는 행동도 이해해 줄 수 있다.      



타협하는 삶을 살기     



내가 하는 말과 행동, 선택하는 모든 것들이 나보다 아이에게 큰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면 나는 한없이 두렵고 취약해진다. 아이는 다 다른 모양이고 육아에는 절대적인 기준이나 정도가 없어 너무나도 어렵다. 동네에서 마주치는 또래 아이들부터 TV 속 연예인의 자녀들까지 다 비교 대상이 된다. 보육과 교육이 부담스러워진다. 아이가 키가 작아도 아이가 발달이 느려도 아이가 아파도 다 엄마 탓 같다. 온종일 잠시도 눈을 못 떼고 아이를 돌봐도 사고는 난다. 마치 눈을 깜빡이는 그 순간을 골라 꼭 탈이 나는 것 같다.      


엄마표 놀이, 엄마표 반찬, 엄마표 학습. 엄마표가 붙는 것들에는 유기농과 수제, 창의력과 완벽이 있고 네모반듯한 인스타그램 사진에는 어린아이를 둘셋씩 키우면서도 먼지 한 톨 없는 깨끗한 집 안과 영양소를 고루 갖춘 완벽한 식판이 넘쳐난다. 사실 정갈한 가구 배치와 깔끔하게 정리된 거실은 쇼룸 아닌가. 산다는 일은 끊임없이 어딘가를 더럽히고 쓰레기를 만드는 일이기도 한데 아이가 있다면 말할 것도 없고. 나만 어지럽고 뒤처지고 부족한 엄마 같다.


하지만 우린 모두 잘 알고 있다. 정작 진짜 우리네 삶은 편집되고 잘려 나간 정사각형 밖에 있다는 걸. 나도 셀카부터 아이 사진까지 올릴 사진은 제일 정갈하고 잘 나오고 번듯한 걸로 고른다. 진짜 생계와 살림은 100장 중 골라낸 두세 장이 아니라 휴지통으로 이동한 97, 98장에 담겨있다. 그러니 SNS에 넘쳐나는 쇼룸과 각종 엄마표를 기준 삼지 말자.      



진짜 생계와 살림은 100장 중 골라낸 두세 장이 아니라 휴지통으로 이동한 97, 98장에 담겨있다.




정우열 정신과전문의는 한때 아빠표 반찬이라며 매주 SNS에 사진을 올렸다. 사진에는 흰밥에 김, 흰밥에 참치캔, 딱 한 가지의 반찬만이 놓여 있었다. 많은 엄마들이 이 사진을 보고 위로를 받았다며 댓글을 달았는데, 나는 이 반찬이 엄마표라고 해도 비난받거나 이상하지 않은 세상이 되길 원한다. 반찬 하나만 해주자는 거 아니다. 때론 엄마도 흰밥에 반찬 하나만 해줘도 죄책감에 자책하지 않는 사회 분위기가 만들어지길 원한다. 나도 당근과 양파, 호박을 잘게 썰어 새우를 넣고 볶음밥을 해줘도 또 반찬이나 국을 뭘 함께 줘야 할까 고민했었다. 엄마라서 말이다.     


아이 있는 삶에서 부지런 대신 대충을 선택하는 엄마는 잘못된 걸까. 아이를 키우는 일만큼이나 나를 성장시키는 일도 중요하게 생각하는 엄마는 이기적인 걸까. 사 먹이는 반찬은 무조건 나쁜 걸까. 어린이집에 가장 늦게 아이를 하원하러 가는 엄마는 죄인인 걸까. 엄마로만 살지 않는 엄마는 부족한 걸까. 아니라고 ‘엄마’들이 말해야 한다.      




당사자에게 ‘~해야 한다’로 끝나는 천편일률적인 의무를 강요하지 않음으로써, 사회의 포용력과 다양성은 한 단계 진보하게 된다.


-전유진 ‘돌봄과 작업’     





집안일은 내 일의 전부가 아니며 엄마도 나의 일부일 뿐이다. 나도 자꾸만 까먹어서 되뇐다. 나는 더 이상 나를 집안일과 커리어, 육아와 엄마라는 역할 속에서 몰아세우거나 다그치지 않으려고 한다. 해야 할 일과 챙겨야 할 것이 너무 많아 화를 내는 대신 적당히 멀티 태스킹하며 조금씩 부족해도 고루 다 해내는 나를 한 번 더 칭찬해 주는 게 낫다. 아이를 키운다는 건 그런 거다. 매번 정신없고 시간에 쫓기는 일. 그러니 전술이 필요하다.   

  

때론 하나를 포기해 보는 건 현명한 타협이 될 수도 있고 적당히는 나를 숨통 트이게 하는 방법이 될 수 있다. 완벽하지 않다고 해서 반드시 부족한 것도 아니니까. 난 오늘도 아이 반찬을 주문한 후 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주방 놀이와 병원 놀이를 함께하며 열정적인 요리사와 환자가 되었다. 요리를 포기하고 놀이를 선택한 것이다. 잠들기 전 아이는 나에게 말했다. “난 엄마가 제일 좋아!” 나도 행복하고 아이도 사랑스럽다.     


 

더 진한 농도의 정성으로 아이를 돌보고 싶은 일상적인 충동을 억누르며 폭발적인 집중력으로 일하는 법을 깨쳐간다. 걸핏하면 불쑥 고개를 들어 나를 좀먹는 죄책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모든 것이 완벽할 수 없다는 사실에 동의하는 법도 조금씩 배워간다. 밥을 지으면서도 글을 지을 수 있음을, 돌봄의 영역 바깥에서 나를 실현할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 아이들을 사랑한다는 사실과 어긋나는 것이 아님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기 때문이다.


-박재연 ‘돌봄과 작업’     





우리 아이가 나를 좋아해 주는 것처럼

나 또한 엄마인 나도, 엄마가 아닌 나도 제일 좋다.  





   


이전 02화 세상 모든 워킹맘들에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