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민성 대장증후군 때문에 학교 오는 게 너무 힘들어요."
우울한 얼굴로 내 앞에 앉은 3학년 여학생에게 나는 뜻밖의 해결책을 제시했다.
"학교가 그렇게 스트레스면 그만두는 게 어때? 우선 사람이 살고 봐야지."
교장의 입에서 나온 '자퇴 권유'에 아이는 당황했다. "중학교 졸업 못하면 취직 못 하는 거 아닌가요?"라며 되묻는 아이에게 나는 다시 물었다. "취직보다 네 마음이 더 소중하지 않니?" 중학교라도 졸업하길 바라는 부모님의 걱정이 아이의 입을 빌려 나온 듯했다.
이 대화의 시작은 지난주 목요일이었다. 출장길에 헬멧도 없이 전기자전거를 타려던 아이를 발견했다. 몸이 아파 조퇴한다는 아이가 위험하게 자전거를 타는 모습에 나는 출장도 제쳐두고 아이를 붙들었다. 겁에 질린 아이는 이름조차 밝히지 않았지만, 전학 온 지 얼마 안 된 3학년이라는 단서를 남기고 사라졌다.
담임 선생님을 통해 파악한 아이의 사정은 안쓰러웠다. 이전 학교에서의 관계 문제로 전학을 왔지만, 이곳에서도 적응의 파도를 넘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아이를 교장실로 불렀다. 4교시가 되어서야 무거운 발걸음으로 나타난 아이에게 나는 "노력해라" 같은 교과서적인 조언 대신 "까짓것 힘들면 다니지 말자"며 마음의 짐을 덜어주었다. 그제야 아이의 얼굴에 작은 미소가 번졌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만두라는 말에 아이는 스스로 답을 찾기 시작했다.
"넉 달밖에 안 남았으니 그냥 졸업하는 게 좋겠어요. 지금까지 다닌 게 아깝기도 하고요."
아이의 계획은 짐작이 가능했다. 오전에 한의원에 들러 침을 맞고, 슬슬 등교해 눈도장을 찍은 뒤 조퇴하겠다는 심산이다. 나는 기꺼이 그 계획의 조력자가 되어주기로 했다. "교실이 힘들면 언제든 교장실로 오라"는 당부와 함께.
월요일 아침, 아이는 교실 대신 교장실을 찾아왔다. 반겨주는 친구가 없으니 나라도 친구가 되어주기로 했다. 오늘은 6교시까지 버텨보겠다는 아이의 가방에, 점심을 굶을까 걱정되어 준비한 사과 주스와 쿠키를 넣어주었다. 그리고 마음을 담은 쪽지 한 장을 쥐여주었다.
"이제부터 교장 선생님이 네 친구야. 행복해서 웃는 게 아니라 웃으니까 행복해지는 거란다. 그냥 실실 웃어보렴. 너 자신이 가장 소중하다는 사실을 잊지 마."
가정이나 학교에서 아이를 한계치까지 몰아붙이는 것은 위험하다. 퇴로가 보이지 않는 절벽 끝으로 아이를 떠밀다가는, 자칫 귀한 생명을 잃는 비극을 초래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퇴로가 열려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아이는 역설적으로 이곳에 머물 힘을 얻는다. 억지로 등을 떠밀기보다 잠시 멈춰 설 권리를 주는 것,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교육이다.
작은 쪽지와 주스 하나에 기대어 남은 넉 달을 악착같이 버텨내길 바라는 게 아니다. 그저 오늘 하루, 아이가 세상을 조금은 덜 무겁게 받아들였기를, 교장실 문을 나설 때의 발걸음이 아침보다 아주 조금은 가벼워졌기를 바랄 뿐이다.
세상을 향해 다시 '실실' 웃어 보일 그날을 기다리며, 나는 오늘도 교장실 문을 활짝 열어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