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피엔스의 입맛, 나의 ‘총각김치’ 도시락

by 해림


“교장 선생님, 애들이 학교 급식이 너무 맛있대요!

학교운영위원회에 참석한 학부모 위원들이 전하는 급식 만족도는 최근 들어 최고조다. 새로 온 영양교사가 식단을 짜기 시작한 뒤로 일어난 마법 같은 변화다.


정작 나를 포함한 나이든 교사들의 식판은 점점 가벼워지고 있는데, 아이들 식판은 반대로 화려해지는 모양이다. “어른 입에 안 맞으니 아이들 입맛에는 딱 맞는 게 당연하겠지요.” 나는 속으로 웃으며 혼잣말을 삼켰다.


요즘 급식 메뉴를 보면 나물이나 채소 반찬은 거의 ‘멸종’ 위기다. 그 자리를 카레, 볶음밥, 짜장면 같은 일품요리와 화려한 디저트 케이크, 달콤한 파우치 음료수가 위풍당당하게 차지하고 있다.


학생들이 국과 나물을 외면하는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교감 시절, 나물 한 젓가락이라도 더 얹어주려던 내 손길을 피해 “어차피 버릴 건데 안 받을래요!”라며 식판을 휙 돌려 달아나던 아이들의 뒷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비단 아이들뿐만이 아니다. 2030 젊은 교사들의 식판에서도 김치와 국은 자취를 감췄다. 대신 수북하게 담긴 고기반찬과 돈가스가 주인공 노릇을 톡톡히 한다.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에 따르면, 사피엔스가 농경 사회를 이룬 건 찰나일 뿐 수만 년을 수렵 채집인으로 살았단다.


우리가 기름진 고기와 단것에 열광하는 건 아프리카 초원을 누비던 시절의 ‘게걸스러운 유전자’가 DNA 속에 살아있기 때문이라나. 그렇게 생각하니 고기 한 조각을 더 받으려 심리전을 벌이는 요즘 아이들의 식성도 어느 정도 고개가 끄덕여진다.

오늘은 한 달에 한 번 돌아오는 생일 밥상 날이다. 미역국과 팥찰밥은 다행히 내 입에도 잘 맞아 모처럼 식판을 비웠다. 하지만 치킨 오븐구이는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을게 분명한데 나물과 두부조림이 대부분 잔반으로 나올 듯하다. 유발 하라리의 이론을 백번 수용한다 해도, 산처럼 쌓여 버려질 나물 더미를 생각하면 환경오염 걱정에 가슴이 답답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관리자의 직업병이다.


사실 지금의 급식은 내가 먹던 엄마표 도시락에 비하면 그야말로 ‘상전벽해’다. 최고급 식재료에 영양 균형까지 맞춘 완벽한 식단 아닌가. 문득 초등학교 시절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대학교수 아들이었던 반장은 분홍 소시지와 참기름 바른 김, 심지어 치즈까지 싸 오며 부러움을 샀다.


하지만 내 도시락 통에는 자르지도 않은 20cm 길이의 총각김치 두 줄기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교사로서 늘 바쁘셨던 어머니의 무심함이 원망스러워, 남이 볼세라 도둑처럼 뚜껑을 가리고 밥을 삼켰던 기억이 돌에 새긴 듯 남아있다. 그 부끄러움이 오죽했으면 내가 직접 주방으로 들어가 형제들의 도시락 반찬을 만들기 시작했을까.

이제는 모든 아이가 같은 반찬으로 식사를 한다. 반찬 통 때문에 마음을 다치거나 부끄러울 일이 사라진 참 좋은 세상이다. 과거엔 부잣집에서도 귀했던 소고기 메추리알 장조림이 흔한 메뉴로 나오는 걸 보면, 아이들에게 “너희 정말 좋은 나라에 살고 있는 거다”라고 한마디 해주고 싶어 입이 근질거린다.


하지만 꾹 참아야 한다. 시대에 뒤떨어진 소리를 늘어놓다가는 한국전쟁 고생담을 들려주시던 나의 어머니처럼 여겨질 게 뻔하기 때문이다. 적어도 아이들에게 ‘꼰대 교장’으로 기억되기는 싫다.

그저 메추리알 하나를 입에 쏙 넣으며, 맛있는 급식 덕에 환하게 웃는 아이들의 얼굴을 보는 것으로 오늘 점심은 대만족하기로 한다.

작가의 이전글할머니가 보여주지 못한 영도다리 도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