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렵 채집인의 DNA와 총각김치 도시락의 기억

메추리알 장조림 앞에서 입이 근질거리는 꼰대 교장

by 해림

“교장 선생님, 애들이 학교급식이 너무 맛있대요!”


학부모 위원들이 전해주는 아이들의 급식 만족도는 최근 들어 최고조다. 새로 온 영양교사가 식단을 짜기 시작한 4월부터 나타난 변화다. 정작 나를 포함한 나이 든 교사들은 식판에 담아 오는 음식의 양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데 말이다. "어른들 입에 안 맞으니 아이들 입맛에는 딱 맞는 게 당연하겠지요." 나는 속으로 웃으며 혼잣말을 삼켰다.


요즘 급식 메뉴를 보면 나물무침이나 채소반찬은 실종되다시피 하고 카레, 볶음밥, 짜장밥 같은 일품요리와 화려한 디저트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학생들이 나물이나 국을 거부하는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교감 시절 급식 지도를 할 때면, 나물을 한 젓가락이라도 더 얹어주려는 내 손길을 피해 “어차피 버릴 건데 안 받을래요!”라며 식판을 휙 돌려 달아나던 아이들의 뒷모습이 선하다.


비단 아이들뿐만이 아니다. 2030 젊은 교사들의 식판에서도 김치와 국은 찾아보기 힘들다. 대신 수북하게 담긴 고기반찬이나 돈가스가 식판의 주인공이다.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에 의하면 사피엔스가 농경 사회를 이룬 건 찰나에 불과하고, 수만 년을 수렵 채집인으로 살았다고 한다.


그러니 우리가 달콤하고 기름진 음식에 열광하는 건 아프리카 초원을 누비던 시절의 '게걸스러운 유전자'가 여전히 우리 DNA 속에 살아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고기와 단것을 탐하는 요즘 세대의 식성이 어느 정도 이해가 가기도 한다.


오늘은 한 달에 한 번 나오는 생일 밥상이다. 미역국과 팥찰밥은 다행히 내 입에도 잘 맞아 모처럼 배불리 먹었다. 아이들은 여전히 두부와 김치를 외면하고 오븐 치킨 구이를 더 받기 위해 소리 없는 심리전을 벌인다.


문제는 버려지는 잔반이다. 유발 하라리의 이론을 수용한다 해도, 산처럼 쌓이는 나물과 국이 환경오염을 일으키고 엄청난 처리 비용을 발생시키는 걸 보면 가슴이 답답해진다.


영양교사에게 채소도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조리법으로 연구해 달라고 신신당부했지만, 편식을 고치는 길은 멀고도 험해 보인다. 지금의 급식은 내가 먹던 엄마표 도시락에 비하면 그야말로 '상전벽해'다. 최고급 식재료에 영양 균형까지 맞춘 완벽한 식단이다.


문득 초등학교 시절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대학교수 아들이었던 반장이 분홍 소시지와 참기름 바른 초록 김을 꺼낼 때, 내 도시락 통에는 자르지도 않은 20cm 길이의 총각김치 두 줄기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초등학교 교사로서 늘 바쁘셨던 어머니의 무심함이 원망스러워, 남이 볼세라 도둑처럼 뚜껑을 닫고 밥을 삼켰던 기억. 그 부끄러움이 계기가 되어 나는 직접 주방으로 들어가 동생들의 도시락 반찬을 만들기 시작했었다.


이제는 모든 아이가 같은 반찬으로 식사를 한다. 반찬 통 때문에 마음을 다치거나 부끄러울 일이 사라진 세상이다. 과거엔 부잣집에서도 귀했던 메추리알 소고기 장조림이 흔한 메뉴로 나오는 걸 보면, 아이들에게 "참 좋은 나라에 살고 있는 줄 알아라"라고 한마디 해주고 싶어 입이 근질거린다.


하지만 참아야 한다. 시대에 뒤떨어진 소리를 늘어놓다가는, 전쟁터의 고생담을 들려주시던 나의 어머니처럼 여겨질 게 뻔하기 때문이다.


적어도 아이들에게 '꼰대 교장'으로 기억되기는 싫다. 그저 오늘 나온 메추리알 하나를 입에 넣으며, 맛있는 급식 덕에 환하게 웃는 아이들의 얼굴을 보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한다.

keyword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연재
이전 22화가장 좋은 것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