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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윈터가든 Oct 29. 2022

가늘고 길게 vs 짧고 굵게

부산시교육청이 본청 소속 1990년생 45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더니 절반이 넘는 56.6%가 6급을 목표 직급으로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4급 이상을 최종 승진 목표로 잡은 공무원은 13.3%에 그쳤습니다. 워라밸 시대 90년생의 시들해진 승진 열기를 보여줍니다. 또 회사 일보다 일과 가정의 양립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이른바 ’ 짧고 굵게’보다 ‘가늘고 길게’를 지향하는 90년생의 가치관을 읽을 수 있는 대목입니다. ‘성공’보다는 ‘안정’을 선호합니다. 승진을 위해 부하 직원을 다그치고, 실적을 내려고 주위에 갑질을 행사할 필요도 없어졌습니다. 공무원 시험에 젊은이들이 몰리는 현상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시교육청 90년생 공무원 “승진보다 워라밸”, 국제신문, 2021년 6월 14일, 6면)


조용한 사직(Quiet Quitting)이란 실제 퇴사를 하진 않지만, 마음은 일터에서 떠나 최소한의 업무만 하려는 태도를 말한다. 조용한 사직은 미국의 엔지니어 자이드 펠린의 틱톡 영상에서 시작되었는데, 그는 해당 영상에서 “주어진 일 이상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그만두는 것을 말한다”며 “일은 당신의 삶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 영상은 약 400만의 조회 수를 기록했으며 이후 소셜미디어에 ‘조용한 사직’이라는 해시태그가 담긴 게시물이 빠르게 펴지고 있다… 한국에서도 조용한 사직 유행이 일려는 조짐이 보인다. 구인 구직 플랫폼 사람인이 지난해 12월 직장인 3293명을 대상으로 ‘요즘 직장인의 자세’를 조사한 결과 70%가 “딱 월급 받는 만큼만 일하면 된다”라고 답했다.

(“딱 월급만큼만 일할래요”... MZ세대의 ‘조용한 사직’, 아시아경제신문, 2022년 9월 27일)


우리 회사 내 옆에 앉아있는 차장님은 일도 깔끔하게 잘하시고, 조용히 다른 사람들 배려하고, 잘난 척하지도 않는, 진짜 스타 직원입니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유홍준 교수님이 말씀하셨던 “인생도처 유상수”, 도처에 고수가 있음을 새삼 깨닫습니다. 예전에 일할 때 이런 팀원이 있었더라면 얼마나 든든했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꼭 이런 분들이 승진이 늦더라고요. 제가 옆에서 안타까워하면 이 양반이 진심으로 하는 얘기가 “저는 가늘고 길게 살고 싶어요.”입니다. 사실 저는 아직도 이 마인드는 아닙니다. 회사에서 중요한 프로젝트를 맡는 것을 좋아하고, 회사와 동료들로부터 인정받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해서, “가늘고 길게”를 원하는 동료들을 잘 이해하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적어도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은 듭니다. 

    요즘 신입사원들의 모토는 “굵고 짧게” 직장생활을 하기보다는 “가늘고 길게”가 훨씬 많습니다. 요즘 미국에서 유행한다는 “조용한 사직(Quiet Quitting)”도 직장에서 맡은 업무만 최소한으로 하고 조용히 살고 싶다는 의미에서 “가늘고 길게” 전략과 비슷한 셈입니다.  

물론 “짧고 굵게” 일해서 마흔 전에 은퇴해서 인생을 신나게 즐기겠다는 MZ세대 “파이어족”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들은 주식 투자나 코인 투자, 부동산 투자 같은, 회사 밖의 투자활동에 승부를 건다는 점에서 샐러리맨의 야망과는 트랙이 다릅니다. 

    고성장 시대에 사회에 진출한 직장인들이 초고속 승진, 최연소 임원 같은 샐러리맨의 성공신화에 열광했던 것과 달리, 저성장 시대의 취준생들은 정년을 보장받는 공무원을 꿈꾸며 노량진 고시학원을 향한다고 합니다. 데이비드 소로가 1840년대 미국 숲 속 호숫가 통나무집에서 살면서 저술한 <월든>의 자연주의적 메시지에 공감하는 오늘의 청춘들에게는, “굵고 길게”라는 야심 찬 메시지는 설득력이 없을 것 같습니다. 자신의 건강과 가정을 포기하며 성공에만 매진해온 아버지 세대 또는 왕년의 선배들의 말로가 그리 행복하지 않았음을 목격했기 때문일까요. “굵으면 짧을 수밖에”라는 조직의 비애를 느꼈을 수도 있고, “괜히 돈 많이 받는 게 아니야”라는 자본주의의 생리를 진작에 깨닫고 이 피로한 경쟁의 레이스에서 벗어나고자 마음먹었을 수도 있습니다. 

    안정적으로, 무리할 필요 없이, 정년까지 평범하게 일할 수 있는 것을 최고의 목표로 삼는 것 - 어쩌면 20대, 30대의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했던 삶의 지혜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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