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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 HAN Dec 19. 2021

러스크는 식빵으로 만든다

음식과 추억에 관한 짧은 단상, 소설


원래 나는 밥보다 섹스가 좋고, 섹스보다 잠이 더 좋은 사람이었다. 이러한 부등호는 나 자신을 '생활리듬이 엉망인 걸레'로 만들기에 충분하고도 남았다.

언제부턴가 변했다기보단 날 때부터 이랬던 것 같다. 한랑 자라야 할 시기인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에도 난 아침을 거르기가 일쑤였다. 일단 아침 밥상을 차려줄 엄마가 없었고, 안 먹냐고 혼내는 아빠마저 없는 탓이 컸다.

사람은 가끔 입에 뭘 넣지 않으면 가방을 들 수도 없을 만큼 배고플 때가 있다. 나도 사람인지라 그런 적이 종종 있었는데, 그때 그나마 목으로 넘어가는 음식이 빵이었다. 아무 맛도 나지 않는 우유식빵. 우유 맛이라곤 한개도 나지 않는. 어차피 집주인인 삼촌과 숙모는 날 신경도 쓰지 않았으며 집에 들어오는 날도 뜸했다. 따라서 내 식단은 바뀔 건덕지가 하나도 없었다.

그래도 함께 사는 사촌 오빠는 날 챙겨주었다. 맞벌이로 바쁜 부모님께 받지 못한 가족간의 애정을 나한테서 찾으려는 속내가 빤히 보였지만, 불쾌하진 않았다. 그 오빠도 아침을 챙겨먹는 스타일은 아니었는데, 적어도 나보단 사람다운 식생활을 영위했다.

나와 1살 터울인 오빠는 남고를 다녔다. 등교 시간도 달랐고 아침에 일어나는 시간도 달랐다. 우리 학교 등교 시간이 30분 정도 빨랐고, 위에서 말했다시피 난 색욕, 식욕보다 수면욕이 더 강한 사람이었다. 때문에 지각도 한 달에 두 세번씩은 고정적으로 할 수밖에 없었다. 오빠가 나가기 전에 문을 똑똑 두드려주긴 했지만 늘상 역부족이었다.

어쨌든 지각과 정상적 등교 사이의 중간, 나와 오빠의 아침시간이 교묘하게 겹쳐지는 날이 때때로 있었다. 그 '때때로'에는 정말 우연찮게 같이 아침을 챙겨먹는 날도 있었다. 그렇다고 식탁에 앉아 단란한 시간을 보내는 건 아니었다. 나는 언제나 하던대로 식빵, 오빠는 어제 먹다남은 저녁거리.

어느 하루는 냉장고에 먹을만한 것이 아예 없었는지 잠에서 깬 내가 거실로 나올 때까지 오빠가 냉장고를 뒤적거리고 있었다. 화장실에서 대충 씻고 다시 방으로 돌아가 기본적인 화장을 마치고 나오니 부엌에서 달콤한 냄새가 풍겨왔다. 달짝지근한 카라멜팝콘 냄새에 희미하게 섞인 부드러운 빵냄새.

"아...미안하다. 식빵 니가 묵는기제? 내가 좀 썼다."

오빠는 그렇게 말하며 후라이팬을 내 쪽으로 내밀었다. 알사탕 정도의 크기로 잘게 잘린 식빵이 영롱한 노란 빛을 머금은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나중에서야 그것이 요즘 유튜브에서 유행하는 '러스크'란 음식임을 알았다.

"함 묵어봐라. 하도 먹을 게 없어가."

"..."

음식 이름은 몰랐지만 향기 때문에 절로 손이 갔다. 아직 따뜻한 온기를 품은 러스크를 입에 넣는다. 화-하게 퍼지는 단맛과 고소함. 볼에 씰룩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저도 모르게 웃었던 것이다. 마치 낮잠을 자고 푹 일어난 주말 오후 때와 같은 만족감. 평일에 일어나서 등교할 때까지 말이라곤 버스 출입문에서 '학생 1명이요' 하는 것말곤 한 마디도 하지 않던 내가 무심코 입을 열었다.

"...맛있네."

"진짜? 처음 해본긴데 지리게 나왔나보네!"

오빠도 손으로 러스크를 한움큼 쥐어서 집어먹었다. 단 걸 좋아하는 건 알았지만 이런 걸 아침이라고 주다니. 내가 말하는 것도 우스웠지만 정상적인 메뉴와는 거리가 통 멀었다. 그래도 맛있었다. 내가 나중에 만들어도 오빠가 만든 것만큼 맛있게 되진 않았다.

참 따뜻한 추억이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그러니까 내가 지금도 기억하고 있는 것이겠지. 그 기억의 단편에 쓸데없는 사족이 없었다는 점도 만족스러웠다. 오빠는 말 속에 다른 뜻을 숨겨두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다른 이보다 대화하기가 편했다. 비록 피차 알콜이 들어가서였다곤 하나, 내가 그에게 몸을 허락한 것도 그런 심리적인 장벽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뒤로도 오빠와 아침을 함께 한 적이 몇번 있었다. 정확히 언제였는지, 또 뭘 먹었는지는 모르겠다. 성인이 된 후로는 연락이 뜸해져서 서로의 기억을 짜맞출 기회가 없었다. 그렇다고 구태여 약속을 잡아서 만날 정도로 내가 당당하게 살고 있는 것도 아니니. 아마 잘 살고 있겠지.

어쩌면 나같은 사람에게 이상적인 신랑감은 그 오빠같은 인간일지도 모르겠다.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침범하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의 호의를 베푸는, 마음이 내키면 찾아가는 단골 술집같은 존재. 입 밖으로 내기엔 좀 부끄러운 본심이다.

삼촌 집을 나온 뒤로 나는 옆에 남자가 있든 없든 위의 저 공식대로 행동했고, 또 그에 맞는 결과와 정의를 얻었다. 서글픈 마음은 없다. 후회도 없다. 그러나 흘러가듯이 살다보면 한번씩 떠오른다.

몇년 전의 그 아침이.
부엌 창문으로 들어온 아침햇살이 비추던 그 러스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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