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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정의할 수 있나요

오늘 저녁메뉴는 죽음입니다

아침에 문자를 받았다. 내가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있다는 것을 아는 어느 작가님이다.     

매일매일 당신의 마지막 날처럼 살아가세요

왜냐하면 그 중의 하루가 마지막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 조나단 스위프트     

 당연한 말이지만, 생각하면 참 무서운 말이다. 언젠가 틀림없이 죽는다는 걸 누구나 알고 있지만 피하고 싶은 일이다. 나는 아니었으면 좋겠고, 오늘, 내일은 아니기를 바란다. 매일 마지막 날이 될지도 모른다고 기억하고 살면 우리 삶이 의미 있어질까. 글쎄 어차피 죽을 거 마음대로 살겠다는 사람도 있다. 

‘You only live once’

한번 사는 인생이니 의미있게 살려는 사람도 있지만 젊은 세대에 YOLO가 유행한 의미는 한번 사는 인생인데 내 맘대로 즐기고 살자에서 시작했다. 부정적인 의미를 담고 시작했으나 우리 나라에 들어오며 긍적적인 의미로 변해서 광고에도 많이 쓰였다. 그런 광고에서는 젊을 때 멋지게 살아보자는 이미지를 강조한다.     

”오늘이 당신의 마지막 날이라면 누구와 무엇을 하고 싶으신가요?“

인생리셋 수업시간에도 참가자들에게 묻는 질문이다. 오늘은 나에게 묻는다. 나는 무엇을 해야할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특별히 하고 싶은 일은 떠오르지 않는다. 어느 바닷가에 앉아 멍때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사랑하는 사람이 옆을 지켜준다면 이상적이겠지만 별로 가능성이 없다. 아들이 있으면 다행이지만 그것도 장담할 수 없다. 

 시아버지는 병원에서 돌아가셨지만 집이 가까워서 다행히 위독하시다는 연락을 받고 가장 먼저 병원으로 달려갔다. 어주 조용히 임종을 맞으셨다. 80대에 암 수술을 두 번이나 하셨으니 기력을 다하고 떠나셨다. 

  어느 일요일 아버지를 뵈러 갔다가 집에 돌아오자마자 연락을 받았다. 6년 넘게 누워계셨지만 임종하던 날도 얼굴을 볼 수 있어서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내일이 마지막 날이 될 거라고 알게 되면 좋을까? 뭔가 준비를 할 수도 있겠지만 죽음을 기다리는 공포감이 클지도 모른다. 


 내가 80대가 된다고 편안하게 ‘이제 죽을 때가 되었어’라고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럴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럴려고 지금부터 죽음이야기를 이렇게 매일 하고 준비를 하는 지도 모르겠다. 마지막에 아등바등하고 싶지 않아서 오늘을 버티고 견딘다. 더 열심히 살아보려고 노력한다. 단 한가지 소망이 있다면 나의 마지막 날을 병원에서 보내고 싶지는 않다는 것이다.     

  죽음학을 공부한다고 하지만 ’죽음이란 무엇이다‘라고 정의를 해 본 적은 없다. 얼마전 만난 시인은 ’죽음은 만질 수 없는 것이다‘라고 정의했다. 일리 있는 말이다, 사랑은 만질 수 있어야 하니까. 우리는 죽음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더 이상 만질 수 없게 된다. 사랑할 수 있을 때 사랑하자.     

  죽음에 관한 가장 아름다운 정의는 임경희 선생님의 <그림책으로 배우는 삶과 죽음>이라는 책에 나오는 초등학교 5학년의 말이다.

”죽음은 두려운 존재일 수 있지만 삶이라는 보석을 닦아주는 손수건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어요. 삶을 더 빛내 주니까요“

정말 그러하다. 바로 오늘 빛나는 삶을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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