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크리스마스 시즌이 다가오면 나이와 성별, 국적에 상관없이 많은 사람들의 가슴이 설렌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연말 분위기와 맞물려, 성탄절은 단순한 공휴일 이상의 각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로마의 주교 율리오 1세가 AD 350년에 12월 25일을 예수 탄신 기념일로 정했을 때, 아마도 그는 전 세계인들이 매년 이 날을 기리며 함께 축복하고 행복한 추억을 쌓을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을 것이다.
프랑스어로 노엘(Noël), 독일어로 바이나흐텐(Weihnachten), 스페인어로 나비닷(Navidad)이라고 불리는 크리스마스는 예수의 탄생을 기념하는 날에서 성스러운 사람의 탄생을 축하하는 명절로 사회적 의미가 확대되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한국, 중국, 일본 중에서 한국만 12월 25일이 성탄 공휴일이라는 점이다. 기독교 문화권인 유럽 국가들과 북미의 미국, 캐나다 그리고 남미와 아시아 일부 국가들만이 12월 25일을 공식적인 할러데이로 지정해놓았다.
우리는 크리스마스 하면 하얀 눈이 펑펑 내리고 빨간 털옷을 입은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선물을 주는 모습을 떠올린다. 북반구의 전형적인 성탄절 모습이다. 하지만 캥거루와 코알라의 나라 오스트레일리아의 크리스마스는 어떤 풍경일까? 해마다 뜨거운 태양 아래 바닷가에서 서핑을 즐기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고 있을 것이다. 지중해에 위치한 몰타로 연말 여행을 온 우리 역시 난생처음 선선한 가을 날씨의 성탄절을 경험하게 되었다.
2020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우리는 몰타의 수도 발레타에서 성탄을 축하하는 사람들과 인상 깊은 하루를 보냈다. 16세기 오스만튀르크의 막강한 공격을 막아낸 발레트 장군의 이름을 따서 만들어진 유서 깊은 도시 발레타에는 아직도 석회암으로 지은 요새와 성벽이 곳곳에 남아있다. 1980년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발레타는 과거와 현재의 역사가 공존하는 유럽 대표도시 중 하나다.
우리는 호텔이 있는 세인트 줄리언스에서 발레타까지 버스를 타고 이동했다. 해안도로를 따라 천천히 이동하는 버스 안에서 몰타 섬을 둘러싼 아름다운 해안가와 도시 모습을 감상할 수 있었다. 주니 품에 안긴 자두는 버스 창가에 바짝 붙어서 바깥 풍경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강아지는 근시에 적록색맹이지만 시야가 넓고 동체시력이 뛰어나기에, 자두의 눈에 비친 몰타는 과연 어떤 모습일지 사뭇 궁금했다.
사람과는 다른 시각능력을 지닌 자두의 눈에 비친 몰타의 풍경은 과연 모습일까?
발레타에 도착해서 우리가 제일 먼저 방문한 곳은 어퍼 바라카 가든이다. 1824년 시민들에게 공개된 발레타의 대표 공원인 이 곳에서 몰타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바라볼 수 있다. 전망대 바로 밑에 있는 포대에서는 매일 바다를 향해 예포를 발사한다. 과거에는 몰타를 지키는 요새였지만, 지금은 다양한 선박들이 오고 가는 항해의 중심지가 된 발레타의 힘찬 숨소리가 내 귓가를 맴도는 것 같았다.
아담하고 전망 좋은 어퍼 바라카 가든의 명물은 의외로 고양이다. 딱히 주인이 없는 길고양이들이 공원을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고양이를 처음 본 자두는 겁이 난 듯 경계하고 지켜보다가 이내 짖기 시작했다. 자두보다 몸집이 크고 언제든 덤빌 것 같은 고양이가 날카롭게 쳐다보자, 강아지 자두는 마냥 무섭고 두려운 기색이었다.
발레타의 어퍼 바라카 가든에서 느닷없이 등장한 고양이를 보고 잔뜩 긴장한 자두
공원을 나온 우리는 발레타의 상징인 크리톤 분수를 감상하며 시내 중심거리로 걸음을 옮겼다. 웅장한 시티 게이트를 지나 모던풍의 석조건물인 국회 건물을 바라보며 중심부로 들어가니 명품 브랜드샵과 고풍스러운 카페들이 우리를 맞이했다. 식사를 제공하는 노천카페들이 즐비한 거리와 쇼핑 중심의 거리가 구분되어 있었다. 거리마다 성탄을 축하하는 조명 장식이 설치되었고 크리스마스 캐럴이 울려 퍼졌다.
발레타 거리에서 성탄을 축하하는 이벤트 중에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조그만 트럭을 개조해서 크리스마스 캐럴을 연주하며 아이들에게 선물을 나눠주는 산타클로스의 모습이었다. 그리 복잡하지 않은 발레타 거리를 걸어가다 보면 몇 번이나 산타클로스 썰매 트럭과 만날 수 있었다. 항상 웃는 눈빛으로 사람들과 축하인사를 나누며 기념사진을 찍어주는 산타클로스 덕분에 발레타의 크리스마스는 한층 풍성해졌다.
1814년 빈 회담에서 영국의 식민지배가 공식적으로 인정된 이후, 1964년 몰타공화국으로 독립할 때까지 150년 동안 영연방의 일원이었던 몰타는 그런 연유로 영어가 공용어다. 영어공부를 위해 세계 각지에서 많은 젊은이들이 몰타로 연수를 오는데, 한국에서 유학 온 학생들도 제법 많다. 우리는 발레타 거리에서, 버스 기다리는 정류장에서 우연히 만난 한국 학생들과 반갑게 안부를 주고받았다.
발레타의 대형 크리스마스 트리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은 자두(좌), 발레타의 명물 카페 코디나 내부 전경(우)
나는 발레타 거리를 거닐다가 고색창연한 카페 코디나를 발견했다. 1837년에 오픈한 이 카페는, 나중에 확인해보니 발레타를 방문하는 관광객이라면 누구나 인증샷을 남겨야 하는 성지와도 같은 장소였다. 30분 이상 줄 서서 기다린 끝에, 우리 가족은 겨우 자리에 앉아 향기 그윽한 커피와 보기만 해도 맛있는 케이크를 시켰다. 몰타에서 보내는 크리스마스 이브의 추억이 꿈결처럼 지나가고 있었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발레타를 떠나 호텔로 돌아왔다. 호텔에서도 크리스마스를 그냥 보낼 수 없다는 듯이 다양한 이벤트로 투숙객들을 환영했다. 산타클로스로 분장한 건장한 체격의 남자와 루돌프 역할의 자그마한 여자가 로비와 객실을 걸어 다니며 선물을 건네주었다. 주니는 자두를 안고 산타클로스와 루돌프와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마스크를 쓴 산타클로스와 루돌프 모습에서 코로나 크리스마스의 슬픈 현실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호텔 로비에서 산타클로스와 루돌프, 주니와 자두가 크리스마스를 자축했다
호텔 로비의 레스토랑에서는 저녁 내내 라이브 공연이 진행되었다. 남성 2명이 연주를 하고 여성이 보컬을 맡은 3인조 공연팀은 크리스마스 캐럴과 성탄 축하 노래를 계속해서 들려주었다. 가족 단위로 테이블에 앉아 음료를 마시는 손님들은 함께 따라 부르기도 하고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무대 중앙에서는 예쁜 드레스를 입은 엄마와 딸이 음악에 맞춰 춤을 추며 흥을 돋웠다.
비록 화이트 크리스마스와는 거리가 먼 청명한 가을 하늘의 크리스마스였지만, 그래도 몰타 시민들과 몰타를 찾은 관광객들은 감사와 축복의 마음으로 성탄절을 기념했다. 코로나19 때문에 일 년 내내 살얼음판 같은 위기와 숨 막히는 봉쇄를 겪어 왔기에, 2020년 크리스마스는 더욱 감동적으로 다가왔다. 무엇보다도 올여름 운명처럼 우리 곁에 찾아온 귀염둥이 말티즈 자두와 몰타에서 연말을 함께 보낼 수 있어서 좋았다.
밤이 깊어가는 몰타의 크리스마스를 보내며, 2021년 12월 25일에는 전 세계의 가족과 연인 모두 마스크 없이 활짝 웃고 입 맞추며 메리 크리스마스를 외칠 수 있기를 간절히 기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