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포말 Dec 02. 2020

기다림


큰 그릇을 만들었습니다. 흙으로 빚은 그릇이라 무겁습니다. 크기도 커서 쉽사리 보관할 곳이 없습니다. 주인은 땅을 파서 그릇을 땅속에 묻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 흙을 가득 채워 놓습니다. 그런 다음 흙으로 덮어 놓았습니다.


그릇은 슬퍼합니다.

'고작 이깟 더러운 흙을 담으려고, 땅속에 묻으려고 날 만들었단 말인가?' 하며 한탄합니다.


오랜 시간 동안 그릇은 그릇 안의 흙과 그릇 밖의 흙과 그릇 위의 흙과 함께 지냈습니다. 축축하고 어두웠지만 살다 보니 지낼만했습니다. 그릇 역시 본래 흙에서부터 와서인지도 모르겠지만 마치 한 몸 같았습니다.


어느 날부터 쿵쾅쿵쾅 소리가 나고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때론 위에서 무거운 무언가가 짓이기도 하고 큰 충격이 느껴진 적도 있었습니다. 다행히 한 몸처럼 지낸 흙 덕분에 버텨냈습니다. 그릇 안에 흙을 채워놓지 않았다면 분명 그릇은 깨지거나 금이 갔을 것입니다. 그릇은 흙이 고마웠습니다.


얼마가 지났을까요? 위의 흙이 걷혔습니다. 빛이 비췄습니다. 주인은 그릇 주위 흙을 조심스레 걷어내고 그릇 안의 흙도 꺼내었습니다. 그리고 그릇을 땅속에서 들어 올렸습니다.


많은 것이 변했습니다. 땅속에 들어가기 전과 주변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주인의 집이 새로 지어졌습니다. 전보다 훨씬 크고 좋아졌습니다.


주인은 그릇을 주인집에 들어가는 문 앞 잘 보이는 곳에 놓았습니다. 그러고 나서는 그릇 안에 깨끗한 물을 부었습니다. 그렇게 그릇은 새로운 모습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릇 안에 담긴 물을 보고 생명수라고 불렀습니다. 그 물을 마시고 몸을 씻었습니다. 그리고 나선 주인의 집으로 들어갑니다. 주인의 집으로 들어가는 모든 사람은 생명수를 마셨습니다. 생명수를 마신 사람만이 주인의 집으로 들어가는 문을 지날 수 있었습니다.


그릇은 기뻤습니다. 이제야 알았습니다. 어째서 주인이 날 만들었고, 날 땅에 묻었는지 말입니다. 기다림이 고마웠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이른새벽3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