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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경미 Oct 24. 2024

이 심방 이 심실, 다정이네

 한 곳에 터를 잡은 지 스무 해가 훌쩍 넘었다. 그에 비하면 주변에 뭐가 있는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한참 모른다. 같은 층에 코가 닿을 듯 마주한 앞집마저도 무심하게 지나치곤 한다. 택배가 쌓였으면 집에 없나 보네, 강아지 소리가 나면 지금은 있나 보네 정도다.

  직장에 출근하자마자 너 나 할 것 없이 가장 먼저 하는 건 컴퓨터를 켜는 일이다. 자기 사무에 바빠서 옆 사람과 눈 맞출 겨를도 없이 흘러갈 때도 많다. 지난날엔 차 한 잔과 함께 가벼운 안부를 나누며 하루 업무를 시작한 때도 있었다. 이제는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인가 싶다.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이 더 부추긴 것도 사실이다. 모니터나 스마트 화면과 눈 맞춤이 잦다 보니 표정은 물론 우리의 심장마저도 굳어져 가는 기분이다.

  심장은 생명과 다름없지 않은가. 주먹만 한 크기에 불과하지만, 어느 순간 파업이라도 하는 날엔 제아무리 장사라도 죽음을 피할 수 없다.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누구나 자연스레 알게 되는 상식 중의 상식이다. 심장에는 혈액을 받아들이는 두 개의 방, 심방이 있고 혈액을 내보내는 두 개의 실, 심실이 있다. 오므렸다 폈다, 생명의 근원인 혈액을 온몸으로 돌 수 있게끔 반복하는 게 그 임무이고 보면, 중요도를 운운하자면 둘째가라면 서러울 만큼이다.

  양자물리학자 붐은 말하고 있다. “인간은 우주를 축소한 소우주다.” 몸의 내부를 태양계와 우주로 설명한다면 태양 자리는 단연 심장이라고 한다. 한의학에서도 심장을 태양과 같은 이치로 본다. 이들은 열기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차갑게 식은 태양은 이미 태양이 아니며, 행성 간의 균형과 조화를 이룰 수 없다는 것 또한 한 치 의심의 여지가 없다. 심장도 마찬가지일 터이다. 온기를 잃어버린다면 우리 몸도, 삶의 균형도 함께 무너지고 말 것이다.

  심장은 또한 마음으로 대변되기도 한다. 마음이 어디에 존재할까. 흔히 심장에 있는 것으로 본다. 언젠가 뇌에 존재한다는 주장을 펼친 어느 의학자의 글을 만난 적이 있다. 심장과 뇌는 끝없이 소통하고 있으며, 심장이 뇌는 물론 감정과 행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최근 들어 뇌에 있다는 견해가 늘어난 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심장 모양을 본떠 하트를 그리고 마음을 표현하기에 익숙하다. 많은 생각과 하루에 열두 번도 더 바뀌는 감정들이 머무는 곳이 심장이고 마음인 것이다.

  마음이란 경우에 따라 좁쌀 한 톨 담지 못할 만큼이거나, 우주가 깃들 만큼 넉넉한 공간이 되기도 하지 않던가. 마음에서 뿜어져 나온 것들이 나를 지나고 동네를 지나서 지구 밖 우주까지 가는 것일 테다. 출발은 언제나 마음에서부터이리라. 마음과 마음이 이어져 집과 동네를 이룰진대 내가 서 있는 곳, 지금 이곳에 차가운 기운만 감지된다면 우리는 마음을 탓해야 할까, 다독여야 할까.

  심장을 연구한다는 하트매스 연구소가 있다. 이곳에서 밝혀낸 바로는 사랑과 감사 그리고 고마움을 느낄 때 몸에 좋은 영향을 끼치는 일들이 일어난다고 한다. 사랑의 감정은 심장 박동이 매우 조화로운 상태에 이르며, 심장의 자기장이 뇌의 자기장보다 오천 배나 강력하고 우리 몸 바깥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입증해냈다. 이런 연구 결과들로 미루어 보건대, 뉴스에서 접할 수 있는 끔찍한 사건 사고들이 우리의 심장과 영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심리학에서 사이코패스는 짜증과 분노 외에는 감정을 거의 느끼지 못한다고 한다. 어르신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청년을 보고 기특하다, 앙증맞은 다람쥐를 보고 사랑스럽다, 이런 감동에 무감각하다는 해석이다. 사이코패스 소설 중에 ‘악의 심장’이라는 작품이 있다. 작가는 과거 검찰청 형사 심리 팀에서 일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이 만난 많은 범죄자들의 대화와 범죄 심리를 연구한 끝에 최악의 사이코패스를 탄생시키기에 이른 것이다. 모든 사이코패스가 폭력성을 띤다는 말은 아니겠지만, 타인의 아픔을 공감하지 못하는 차가운 심장을 가졌음에는 틀림이 없을 듯싶다.

  AI나 챗봇과 관련된 직장 연수가 늘어나고 있다. 아날로그 감성을 가진 나로선 별 관심이 없기는 하지만, 디지털 문화에 젖어있는 요즘 세대들과 소통하자면 아예 나 몰라라 할 수도 없다. 인공지능이나 로봇을 활용해 인간의 삶을 이롭게 하는 영역도 분명 있을 테지만, 신의 영역까지 침범하고자 한다는 우려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공상과학영화에서 본 무서운 일들이 현실이 되어 우리 앞에 설 때 섬뜩해진다. 디지털 휴머니즘을 부르짖으며 제아무리 감정을 이입한다 할지라도 그것에는 신이 창조한, 신과 교통할 수 있는, 우주를 깃들이게 하는 심장, 이 심방 이 심실이 없지 않은가 말이다.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제목에 이끌려 냅다 집어든 책이다. 부드러운 카페라떼 같은 인문 서적이거니 기대했는데 에스프레소 맛이 흠뻑 배어있는 과학책이었다. 많은 이론과 실험들 그리고 여러 가지 사례들은 다정함의 중요성을 논하고 있었다. 과학적이고도 숫자로 딱 맞아떨어진 부분은 오히려 이해하기가 쉬웠다. 환경에 적응하는 생물만이 살아남고 그렇지 못한 것은 도태되어 멸망하는 적자생존의 개념을 흔들어 놓았다. 이기는 자만이 살아남는다는 기존의 틀까지 여지없이 무너뜨리고 말았다.

  무리를 이루고 채집을 하며 함께 살아남은 종이 바로 우리 인류가 아니던가. 그것이 모두 다정함에서 비롯된 한 형태였음을 비로소 알게 된다. 호모사피엔스를 번성하게 한 주요 원인이 친화력과 협력이라고 말한다. 실험의 대상이 된 가축들 또한 친화적인 선택에 따라 몸집도 커지고 번식력도 높아졌다.

  “우리의 삶은 얼마나 많은 적을 정복했느냐보다 얼마나 많은 친구를 만들었느냐로 평가해야 한다.” 이 말을 끝으로 모든 증명은 마무리가 된다. 내 가족, 내 친구, 내 집단에 치우친 잘못된 방향이 아닌, 넓고 보편적인 공감을 가지게 하는 확장된 다정함만이 우리 종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비결이었다.

  차갑기만 한 곳에서는 생명이 움트기도 힘들고 살아남기는 더더욱 어렵다. 시대는 점점 냉정함으로 치닫는 느낌이다. 친구들은 서로 도울 상대가 아니라 경쟁대상이 되어 가는가 싶다. 친구를 밟기까지 해야만 자신이 올라설 수 있는 사회구조로 급변하고 있는 것 같다.

  완벽한 신은 실수투성이인 인간을 만들었으나, 그런 인간이 만든 기계들은 완벽을 추구하고 실수를 용납하지 못한다. 최첨단 기술을 가진 지금 현대는 다 이룬 듯 보이지만 결정적 실수 하나가 있는 것 같다. 그것은 바로 따뜻한 정, 곧 다정의 부재가 아닐까 싶다. 이것을 심장이 있다, 없다의 차이로 본다면 혼자만의 무리한 상상일까.

  아파트를 대할 때마다 꽁꽁 닫힌 심장이 켜켜이 쌓였다는 생각이 든다. 여닫기를 위한 창들이 오로지 닫기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 같아 씁쓸함마저 인다. 창을 열고 손 흔들며 안부를 전하는 기대는 더 이상 무리인가 보다. 어느 사이엔가 정이 넘치는 이웃사촌이란 말도 박물관의 한 자리를 차지한 유물처럼 느껴진다. 심장과 심장이 만나 집을 이루고, 도시를 이루었다. 심장들이 점점 온기를 잃어 따뜻함이라고는 눈곱만큼도 남지 않았을 때, 우리는 과연 무엇으로 살아남을 수 있을까.

  도시 어느 한 곳에 웅크리고 있을지 모를 다정(多情)을 생각한다. 고마워, 미안해, 괜찮아… 살가운 한마디 말이, 옆집에서 건너온 음식 한 접시가 지친 우리를 다독여 주고 감싸 안아 주던 기억을 잊지 못한다. 

  이제라도 무조건 이기려고 바동거리던 마음을 돌이킨다. 할 수만 있다면, 이 심방 이 심실 어느 한 곳에 다정이네를 세 들여서라도 차가워져만 가는 심장과 이웃을 데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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