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이다! 창문을 열다말고 순간, 손이 얼어붙는다. 한껏 다리를 오므리고 벌은 뒤집어진 채 작은 떨림마저 느껴지지 않는다. 멀찍이 팔을 뻗어 볼펜 끝으로 건드려 봐도 여전히 움직임이 없다. 얼마나 바동거렸을지. 벌의 주검은 백 마디 말보다 더 큰 울림으로 다가와 나를 사로잡는다.
이틀 전이었다. 벌 두 마리가 안으로 들어왔다. 밖으로 내 보내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벌은 도리어 창틀에 갇히고 말았다. 학교 교실 창문들이 그렇듯 제법 커다란 사각형이다. 손가락 한 마디도 되지 않는 벌에게 창은 쉬이 가늠할 수 없는 세계였을지 모를 일이다. 벌은 조심조심 앞으로 나아갔지만 가장자리 창틀에 다다를 때마다 방향을 바꾸기 일쑤였다. 창틀을 넘기만 하면 밖으로 이어진 더 넓은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벌은 알 리 없었을 것이다.
나는 학교에서 돌아와 혼자 있을 때가 많았다. 친구와 어울리기 좋아하는 동생은 밖으로, 농사일로 바쁜 부모님은 논밭으로, 하교가 늦은 언니 오빠는 학교에 있을 시간. 텅 빈 집 빈 방에서 숙제를 하며 라디오 음악을 들었다. 책장 가득 꽂혀있던 낡은 문제집과 책을 뒤적거리거나 낙서를 하며 놀았다. 굳이 밖으로 나가려 애쓰지 않아도 나를 채워줄 즐거움은 많았다. 높다랗게 등을 곧추세우고 있는 방의 벽들도 덩그러니 혼자 있는 나를 가두거나 즐거움을 빼앗지는 못했다.
벌은 길을 잘못 들었거나 호기심에 이끌려 안으로 들어왔지만 밖으로 이어진 길을 쉬이 찾지 못해 헤매는 모양새였다. 나는 벌들이 훌쩍 날아오르거나 천천히 기어서라도 창틀을 넘어 밖으로 나갈 수 있기길 간절히 바랐다. 어떻게 해서든 벗어나게 해주고 싶어서 아래 위 할 것 없이 창문을 활짝 열어두었다.
퇴근 무렵이었다. 창틀에 갇혔던 벌 두 마리가 보이지 않았다. 이리저리 살펴봤지만 어디에도 없었다. 드디어 빠져 나간 모양이었다. 더 넓은 곳으로 날아간 것에 대한 반가움이랄지. 벌에게 쏘일 위험에서 벗어난 안도감이랄지. 염려 하나를 덜어냈다는 생각에 속이 시원하였다. 어찌된 일일까. 까맣게 잊었는데 이틀이나 지난 오늘 아침, 느닷없는 주검으로 내 앞에 나타난 게 아닌가. 나의 간절한 바람과는 달리 결국 밖으로 나가지 못했단 말인가.
유년부터 나는 글과는 뗄 수 없는 존재처럼 여겼다. 무언가 긁적일 때면 그것만으로도 실실 웃음이 날 정도였다. 초등학교 때 일기에 시를 썼던 기억도 난다. 어른이 된 후 알게 되었지만 동생이 내 일기장에서 몰래 베낀 시로 상을 받고 학교 대표가 되어 맘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6학년 졸업을 앞둔 어느 날, 담임 선생님께서 교무실에 따로 나를 불렀다. 글쓰기에 재능이 있으니 일기도 쓰고 책도 읽고 앞으로 열심히 해보라는 것이었다. 훗날 선생님의 당부대로 아동문단으로 당당히 들어가는 행운을 얻게 되었다. 길거리에 나가 누구라도 붙잡고 자랑하고 싶었고 아무도 없는 산꼭대기에 올라 큰소리로 외치고 싶을 만큼 벅찼다. 언제부터였을까. 나를 춤추게 하던 기쁨이 서서히 생기를 잃어가고 있었다.
더 이상 즐거움은 내 것이 아니었다. 같은 시기에 시작한 동료들이 좋은 글도 발표하고 책도 척척 내는 반면 나만 제자리걸음인 것 같았다. 점점 퇴보하고 있다는 생각에 다다르자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나는 재능이 없나보다. 이 길은 내 길이 아닌 것이야.’ 틀 속에서 나아갈 길을 찾지 못해 맴돌기만 하던 벌처럼 나 또한 그랬다. 스스로를 가두는 생각에 부딪칠 때마다 더 웅크려들었다. 급기야는 뒤집혀진 벌처럼 허공을 향해 발을 버둥거릴 뿐 앞은커녕 어디로도 나아갈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그만 접기로 마음을 먹었다. 펴둔 노트를 덮고 채워둔 책장의 책들은 한 때 살붙이 같았지만 버리기로 한 이상 도리가 없었다. 다 꺼냈다. 한 무더기를 쓰레기 더미에 쏟아 붙고 왔을 때 바닥에 남아 있던 것들이 말을 거는 거 같았다. 애써 외면을 하며 빙 둘러 지나쳐 다녔다. 그러기를 며칠, 끝내 버리지 못하고 다시 책장에 꽂아 두고 또 여러 해를 보냈다. 글 한 줄 쓰지 못하는 무능력자라해도, 넓은 글 세상에 나아가지 못한다 해도 아파하지 않을 거라고 마음을 쓸어내렸다. 오랜 두려움은 또 다른 외로움을 불러들였기에 나는 이중 창틀에 갇힌 꼴이 되고 말았다.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시구를 되뇌며 애써 스스로를 다독이는 시간이 늘어만 갔다.
창틀에 갇혀있는 동안 벌은 어땠을까. 한 마리는 갇혔지만 갇히지 않았고 또 한 마리는 죽음으로 영원히 갇히고 만 것인가. 그 순간 두 마리 다 최선이었을 것이다. 나 또한 그랬노라고 한다면 궁색한 변명이 될까.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옥쥐어 오는 압박의 순간이 있었고 마치 내가 쓸모없거나 실패한 인생인양 무기력하게 지낸 나날들이었다. 주검으로 내 앞에 있는 벌과 무엇이 달랐을까. 외로움의 틀은 더욱 견고해져 갔다. 나는 시나브로 안으로 잦아들었다.
‘외로움이 찾아올 때, 사실은 그 순간이 인생에 있어 사랑이 찾아올 때보다 더 귀한 시간이다. 쓴 외로움을 받아들이는 방식에 따라 한 인간의 삶의 깊이, 삶의 우아한 형상들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한 번씩 들춰보곤 하는 어느 시인의 산문집에 있는 글귀다. 우리는 모두 각자 다른 방식으로 외로움을 받아들이고 해석해낸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와는 다른 상황이었다 하더라도 두 마리 벌을 대하고 보니 아찔한 생각마저 인다. 그 방식에 따라 날아오르기도 혹은 죽음에 이르기도 한다니 말이다.
길고긴 외로움의 시간들은 조금이나마 깊이 있게 혹은 우아한 삶으로 나를 이끌었을까. 나의 두려움과 외로움이란 아픔을 뚫고 날아오르려는 용기가 없어서 겹겹이 에워싸고 스스로를 옥죄게 한 이중 틀이었을 것이다. 그렇다 해도 그 시간들이 쓸모없거나 패배한 것은 결코 아니었으리라. 높아진 마음이 낮아지고 모든 순간들이 다 소중했음을 가르쳐준, 나에게 만큼은 필요해서 허락된 귀한 시간들이 아니었을까 되돌아본다.
마저 창문을 연다. 오므라들 대로 오므라든 벌의 주검을 종이 위에 올린다. 두 발을 한껏 세우고 힘껏 날려 보낸다. 보이지 않는 또 한 마리 벌과 더 넓은 곳에서 만날 수 있기를 바라는 맘도 함께 싣는다. 아무도 없는 방에서도 즐거움을 누리던 유년의 내가 반짝, 스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