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C 살인사건(1936) 애거서 크리스티
[세계 추리문학전집] 03/50
"나는 흉악범 잡아서 감옥에 안 보내." "그러면요?" "죽여." 그렇지만 탐정이 살인범이 되면 안 되기 때문에 범인에게 자살을 권유하는 에르퀼 푸아로. 그는 이번에도 살인범을 저세상에 보내는 선택을 할 것인가? 『ABC 살인사건』에서 죽일지 말지 정해야 할 대상은 연쇄 살인범. 그는 푸아로에게 편지를 보내 살인을 예고한다. 이 편지는 한 판 추리 싸움을 벌이자는 초대장이기도 하다. 게임이 시작되고 성과 이름이 모두 A로 시작하는 노인(Alice Ascher)이 시체로 발견된다. 다음 차례는 B의 여자, 그다음은 C의 남자다. 곁에는 ABC 철도 안내서가 놓여 있다.
서로 다른 도시. 휴양지와 경마장 가까운 장소에서 알파벳 순서대로 죽어나가는 사람들. 예고 살인. 강박에 시달리는 것으로 보이는 범인. 누구나 구미가 당길 추리소설 속 설정이다. 하지만 올바름의 상식을 지닌 오늘의 독자가 볼 때 죽음을 너무 유희적으로 다룬 것 아닐까 생각이 들만도 하다. 그렇다면 살인의 '동기'를 살펴봐야 한다. 사건이 해결된 것처럼 보인 결말 부에 이르렀는데도 푸아로는 말한다. 범행 동기를 알 수 없어서 몹시 걱정된다고. 이 동기를 파헤치고 ABC 연쇄 살인의 비밀을 밝히는 것. 탐정 푸아로와 독자에게 주어진 과제다.
가디언지가 애거서 크리스티 베스트 10에 선정했고 출판사 황금가지가 에디터스 초이스 10에 포함한 대표작이다. 다만 명성에 비해 중반을 지날 때까지는 흐름이 평이해 보인다. 알파벳 순서대로 살인이 일어난다. 이름조차 범인다운 용의자를 여러 번 보여준다. 수사 그룹은 결정적 실마리를 확보한다. 여기에 이르면 정말 이렇게 끝나는 것인가, 생각이 든다. 그러나 '과제'를 다 풀고 나면 책은 앞 90%와 전혀 다른 작품이 된다. 반전, 전환 등 어떤 용어로 부르든 간에 획기적인 결말. 작가는 최상의 기교를 발휘하여 독자의 작은 회색 뇌세포를 자극한다.
무관해 보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연관성을 찾아내는 '미싱 링크' 미스터리의 원형인 작품이다. 체스 말들로 정교하게 살인을 설계하는 플롯의 전범 또한 보여준다. 매력적인 이야기 구조는 후대의 여러 미스터리가 변주했다. 윤활유처럼 프랑스어를 섞어 쓰고, 사건의 전모를 설득력 있게 해설하는 천재 푸아로의 영향력도 물론 지대했다. 푸아로가 등장한 장편 30여 편과 단편 50여 편 중에서도 『ABC 살인사건』은 특별한 면이 있다. 이름 헤라클레스(에르퀼)가 추리 과정에서 흥미롭게 사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