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후기,리뷰/왓챠, 넷플릭스 일본 로맨스 영화 추천/결말 해석]
개봉일 : 2004.10.29. (한국 기준)
감독 :이누도 잇신
출연 : 츠마부키 사토시, 이케와키 치즈루, 아라이 히로후미, 우에노주리
담담한 시선으로 돌아본 보통의 사랑
일본 영화엔 특유의 담백함과 설렘, 서정적인 느낌이 있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은 일본 영화 특유의 담백함과 서정적이고 아련한 느낌을 잘 담아낸 로맨스 영화다. 개봉한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고, 그 사이 많은 일본 로맨스 영화가 국내에도 개봉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을 여전히 기억하고, 또 가끔씩은 그리워하는 건 이 영화가 가진 깊은 매력 때문이 아닐까 싶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의 주인공들이 얘기하고 있는 건 귀엽고 오글거리는 로맨스가 아니다. 끝없이 달달하고 환상적인 사랑도 아니다. 이 영화는 위태롭고 깊은 바닥과 비대칭인 저울 위에 올라앉은듯한 현실에서 처음으로 느껴보는 안정적인 사랑, 그리고 시간이 지나며 변해가는 것들을 눈물 날 만큼 담담하게 돌아본다.
영화가 끝나는 순간 영화 속 주인공들의 시간은 멈춘다. 그 후 영화의 밖으로 홀로 튕겨 나온 나는 이 영화의 옅고 날카로운 여운에 불타 하룻밤을 지샜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이라는 제목만으로는 이 영화가 어떤 느낌일지 바로 감이 오지 않을 것이다. 이런저런 머리말을 붙여봐도 영화의 끝에 밀려오는 여운을 설명하기엔 부족할 것 같다. 이런저런 설명은 필요 없다. 너무도 현실적이고 어른스러운 그들에 사랑이 깃든 시간에 빠져보시라.
심야 아르바이트를 하던 대학생 츠네오는 손님들로부터 할머니가 끌고 다니는 수상한 유모차에 대해 듣게 된다. 어느 날, 소문으로만 듣던 그 유모차와 우연히 마주치게 되고 조제라는 이름의 한 여자를 알게 된다.
"좋아하는 남자가 생기면 보고 싶었어."
강렬했던 첫 만남 이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호랑이, 물고기 그리고 바다를 보고 싶었다던 조제. 그런 그녀의 순수함에 끌린 츠네오의 마음에는 특별한 감정이 피어난다.
“언젠가는 나도 당신을 사랑하지 않겠지. 우린 또다시 고독해지고.. 모든 게 다 그래.”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뜨거운 감정을 나누는 날들도 잠시, 츠네오와 조제는 이 사랑의 끝을 예감하게 되는데...
찰나를 포착한 여행 사진들이 지나간다. 수족관 앞에 서있는 휴관 표지판, 부서진 조개, 부서진 전구. 별거 아니지만 소중했던 찰나의 순간들이 지나가고, 시간은 츠네오와 조제의 첫 만남의 순간으로 돌아간다. 게임장에서 일하고 있는 츠네오는 한눈에 봐도 성실하고 건실한 대학생이다. 열심히 일을 하던 도중, 꼬부랑 할머니가 유모차를 밀고 다닌다는 손님들의 카더라 통신을 들은 츠네오는 무의식중에 ‘할머니’와 ‘유모차’를 기억하게 된다.
해가 뜨고, 퇴근길에 오른 츠네오의 앞에 갑작스럽게 유모차가 굴러내려온다. 둘의 만남은 ‘운명’ 그 자체였다. 오르막길에서 갑자기 굴러내려온 유모차. 그리고 그 안에 웅크리고 앉아있는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 여자. 츠네오는 얼떨결에 조제의 집에서 아침식사를 하게 된다. 색조화장품은 거의 보이지 않는 간단한 화장대, 바닥에 가득 쌓여있는 책, 소박하지만 맛있는 계란말이, 옷장 아래 칸에 펼쳐져 있는 이불. 낯설지만 포근한 조제의 집에서 아침 시간을 보낸 츠네오는 독특한 매력을 가진 조제를 쉽게 잊지 못한다.
츠네오는 농담을 몇 번 나누고, 함께 밥을 먹으며 손쉽게 이성을 꼬여낸다. 하지만 조제는 어딘가 다르다. 츠네오에게 경계심을 쉬이 풀지 않고, “대학생이면서 그런 것도 모르냐”라며 꾸짖는다. 츠네오는 그런 조제 앞에서 한없이 조심스럽고 섬세해진다. 츠네오는 고양이나 꽃 같은 사소한 것부터 시작해, 이것저것 봐야 할 것이 많다는 조제의 말을 듣고 한참을 웃더니, 어느 날엔 조제를 위해 유모차를 개조한다.
같은 주방에서. 요리를 하고, 조제의 음식을 맛보며 칭찬하고 ‘조제’라는 이름을 알아가는 사이, 츠네오와 조제의 거리는 조금씩 좁혀진다. 조제의 할머니는 하반신이 불편한 조제에게 “불구면 불구답게 살아라”라고 말하지만, 츠네오는 조제를 ‘불구의 몸을 가진 사람’이 아닌 그저 ‘사랑하는 여자’로 바라본다. 조제를 바라보는 츠네오의 시선은 불탈 듯 뜨거운 것은 아니지만, 조제의 달걀말이처럼 부드럽고 따스하다.
츠네오와 조제가 함께 이른 아침이 아닌, 오후 시간에 산책을 나간다. 타인의 눈을 피해 이른 아침에만 산책을 해온 조제에게 에너지 넘치는 오후의 모습은 다른 세계를 만난 듯 새로운 것이었다. 조제의 눈에 담기는 세상의 모습이 신선하고 활기차다.
츠네오는 조제에게 새로운 일상을 선물한다. 할머니의 말대로 집안에만 앉아있는 생활이 아닌 남들처럼 사랑하고, 세상을 구경하는 것. 외롭지 않은 시간들. 츠네오와 조제는 서로에게 특정한 프레임을 씌우지 않고, 그저 사랑할 뿐이다. 츠네오의 동생과 후배들도 둘의 사이를 존중하고 응원해 준다. 츠네오가 조제와 만나기 전까지 연인 관계를 유지하던 가나에는 바닥에 앉아있는 조제를 내려다보고, 그녀의 장애를 특권이라며 모진 말을 내뱉기도 하지만 츠네오의 선택을 받아들이고 뒤로 물러난다.
거짓말이야. 있어줘. 가지 말고 여기 있어줘
조제의 할머니가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은 츠네오는 조제의 집을 찾아간다. 무겁고 초연한 공기 속에서 츠네오와 조제는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한층 더 가까워진다.
사랑하는 남자가 생기면, 같이 보고 싶었어.
조제와 츠네오는 같은 색의 옷을 맞춰 입고 동물원 데이트를 한다. 날카롭고 묵직하게 으르렁거리고 있는 호랑이 앞에서 조제가 말한다. 사랑하는 남자가 생기면 함께 호랑이를 보고 싶었다고 말이다. 내가 가장 무서워하는 존재인 호랑이를 가장 사랑하는 남자와 보는 것. 조제는 평생 사랑하는 남자를 만날 수 없을 거라 생각했지만, 그녀의 옆엔 사랑을 담은 눈빛을 보내는 츠네오가 서있다. 행복하다. 따스하다. 조제와 츠네오의 1년은 그렇게 지나갔다.
한 달 후, 일 년
그렇게 1년이 지나고, 고장난 조제의 유모차가 보인다. 옆집 아이들은 츠네오에게 유모차를 고쳐달라며 조잘조잘 떠들어대지만, 조제는 “못 고친대”라고 말한다. 조제와 츠네오의 추억이 담긴 유모차는 고장 나고, 츠네오는 조제를 등에 업는다. 유모차를 밀며 함께했던 1년 전보다, 온전히 조제의 무게를 받쳐내야 하는 지금. 츠네오는 조금씩 지쳐간다.
조제와 츠네오는 처음이자 마지막 여행을 떠난다. “일주일 전부터 준비했는걸!”이라며 들뜬 모습으로 여러 가지 간식을 내놓는 조제와 그녀를 바라보는 츠네오의 눈빛이 예전과 비슷한듯하면서 묘하게 서글프다. 츠네오의 동생은 여행 중에 전화를 건 츠네오에게 “형 지쳤어?”라고 묻지만, 츠네오는 명확한 답을 내놓지 못한다.
집이 아닌 더 큰 세상에 나온 조제는 한껏 들떠있지만, 그녀를 온전히 등에 업어야 하는 츠네오는 조금씩 힘이 부친다. 츠네오는 나도 언젠간 늙으니 휠체어를 사는 게 좋지 않겠냐고 제안한다. 조제는 평생 네가 업어주면 된다며 웃어 보인다. 츠네오의 “휠체어를 사라”는 말은 내가 없어도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찾아보라는 뜻이었을까.
조제도 츠네오의 마음을 느꼈는지 깊은 바닷속 물고기 이야기와 함께 그 삶으로 돌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고 말한다. 조제는 깊은 바닷속 바닥에 붙어살던 물고기였다. 할머니의 말처럼 일반인과 다른 삶. 집 밖에 나가는 것조차 마음대로 하지 못하며 남들이 버린 책을 수십 번 읽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답답한 삶. 그런 조제의 삶에 츠네오라는 첫사랑이 찾아왔고, 조제의 일상은 변화를 맞이한다. 하지만 이제 그 사랑이 떠나려고 한다. 조제는 처음엔 “가지 말고 있어줘”라며 츠네오를 붙잡지만, 1년 후엔 “그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라며 다시 예전의 삶으로 돌아가는 것을 받아들인다.
영화의 초중반부에서 조제는 프랑수아즈 사강의 한 달 후, 일 년이라는 책을 좋아한다고 말한다. 조제는 어디서나 그 책을 읽었고, 조제라는 이름도 책에서 따온 것이다. 츠네오는 조제를 위해 속편을 구해주었고, 조제는 매우 기뻐하며 책을 읽는다. 책의 내용은 1년 후, 그와 나의 마음이 변할지도 모른다는 것. 하지만 우리에겐 함께한 1년의 시간이 온전히 남을거란 것이었다. 즐겨읽던 책의 내용처럼 조제와 츠네오의 사랑은 변하게 된다.
생각보다 담백한 이별이었다. 미친 듯 눈물을 쏟지도 않았고, 처절하게 붙잡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원망하지도 않았다. 조제는 새로운 휠체어를 타고 세상에 나간다. 조제와 츠네오의 사랑은 변했다. 그리고 조제도 츠네오도 변했다. 지극히 현실적이면서 슬프다.
난 ‘몸이 불편한 연인과 사랑하는 이야기’라면 대부분 해피엔딩일 거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건 정말 편협한 시선이었다. 조제는 하반신 마비를 겪고 있는 여주인공이 아닌 그저 강하고 순수한 여성이자 츠네오의 사랑이었다. 그리고 츠네오 또한 그녀의 장애를 ‘극복해야 할 것’ ‘힘든 것’따위로 인식하지 않고, 조제라는 사람의 일부로 받아들인다. 만일 츠네오가 조제를 ‘몸이 불편한 여성’으로 인식했다면 이토록 담백하게 헤어질 수 없었겠지.
처연하지만 담담하다. 현실적이기에 더욱 가슴이 저리다. 가장 무서운 것을 함께 바라보며 극복했지만 정작 나의 세계는 함께 바라보지 못했던 사랑.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이 짙은 여운을 남기는 건 ‘특별한 연애’가 아닌 ‘보통의 연애’를 이야기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특별한듯하지만 너무도 평범하고 담백한 사랑에 대한 이야기. 지나간 시간이 떠올라 마음이 불편해질 때면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이 생각날 것 같다. 이 영화의 여운이 지나가고 나면, 어른스럽고 담백하게 내 마음을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