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후기,리뷰/왓챠, 퀴어, 로맨스, 히스 레저 영화 추천/결말해석]
개봉일 : 2006.03.01. (한국 기준)
감독 : 이안
출연 : 제이크 질렌할, 히스 레저, 미셸 윌리엄스, 앤 해서웨이, 랜디 퀘이드, 린다 카델리니
우리를 남기고, 당신을 기다렸던 산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뿐인데, 사회적 통념은 너무도 날카롭고 무겁다. <브로크백 마운틴>의 두 주인공 잭과 에니스는 남자다. 둘은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서로를 마주하고, 함께 시간을 보내며 미묘한 사랑의 감정을 싹 틔운다. 푸른 들판, 높고 맑은 하늘, 질리도록 먹는 콩 통조림, 셀 수 없이 많은 양들. 아름답기도, 지겹기도 한 풍경 속에서 사랑은 그렇게 갑작스레 찾아온다.
<브로크백 마운틴>은 ‘동성애’라는 정형화된 단어보다는 인류애, 우정, 순도 높은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다. 사람들은 잭과 에니스의 강렬하고 절절한 사랑이라는 감정을 믿지 않는다. 애초에 타인에게 이야기한 적도 없지만, 그들은 아마도 믿지 않을 것이며, 그것을 혐오 할것이다. 잭과 에니스는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긴 시간 동안 사랑을 숨기며 유일하게 ‘우리’가 될 수 있는 장소 브로크백 마운틴을 맴돈다.
<브로크백 마운틴>을 보기 전, 잭과 에니스를 맡은 제이크 질렌할과 히스 레저의 조합이 이렇게 좋을 줄은 미처 몰랐다. 사실 예전에 포스터를 딱 봤을 때, 강력하게 끌린다는 느낌을 받진 않았기에 미루고 미뤄뒀던 기억이 있다. 그 후, 처음 <브로크백 마운틴>을 봤을 때, 이 영화를 미뤄둔 과거의 내가 바보 같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영화를 보며, 또 한 번 히스 레저라는 배우를 그리워하게 됐다.
잭과 에니스의 사랑 이야기를 보며 내가 느낀 감정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 잘 모르겠다. 아련함, 후회, 애잔함, 저릿함. 또는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 제이크 질렌할과 히스 레저의 눈빛이 주던 질감이 내 마음의 끝 지점에 진하고 선명하게 다가왔다. 이게 이들의 사랑인 걸까. 브로크백 산은 잭과 에니스의 사랑을 온몸으로 감싸 안으며, 이들의 속삭임에 귀 기울였겠지. 여러 형태의 여운이 마음속에 맴돈다.
눈부신 만년설로 뒤덮인 8월의 브로크백 마운틴. 양 떼 방목장에서 여름 한 철 함께 일하게 된 두 청년 '에니스(히스 레저)'와 '잭(제이크 질렌할)'은 오랜 친구처럼 서로에게 마음을 터놓는 사이가 된다. 그들의 우정은 친구 이상으로 발전하지만 두 사람은 낯선 감정의 실체가 무엇인지도 알지 못한 채 다시 만날 기약도 없는 각자의 삶으로 돌아간다
우연히 4년 만에 다시 만난 '에니스'와 '잭'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두 사람은 일 년에 한두 번씩 브로크백에서 만나 함께 지내기로 하는데...
1963년 와이오밍 주, 일자리를 찾아 브로크백 마운틴을 찾아온 잭과 에니스는 어색한 첫 만남을 가진다. 일찌감치 걸어와 컨테이너 앞에서 담배를 피우며 시간을 죽이고 있던 에니스 앞에 거칠게 차를 몰고 나타난 잭. 일거리를 찾아온 두 사람은 야영지에서 하루를 보내고, 밤이면 양과 함께 자는 양치기 일을 맡게 된다.
둘의 첫 만남은 여느 타인을 만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둘 사이엔 어색한 공기가 가득하고, 잭은 자동차 백미러를 보며 면도를 한다. 뒤에 조금씩 비치는 에니스를 한 번씩 흘겨보면서 말이다.
2번째로 브로크백 마운틴에 온 로데오꾼 잭, 결혼을 앞두고 집을 마련하기 위해 일을 구하러온 에니스. 두 사람은 정반대에 가까운 성향을 가졌고, 전혀 다른 가정환경에서 자랐다. 하지만 둘은 서로에게 자연스럽게, 그리고 강력하게 이끌리기 시작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마음이 생기는 것에 대해 명확한 이유를 댈 수 있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맑은 하늘, 끝없이 펼쳐진 들판, 쉼 없이 울어대는 양 떼. 광활한 자연 속에 있는 잭과 에니스를 지켜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차가운 공기 속에서 불을 지피고, 지겨운 콩 통조림을 먹는 저녁이지만 두 사람은 깊은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를 알아간다.
둘 중 한 명이 밤새 양들을 보살펴야 하는 양치기 일. 저녁을 함께 먹은 후, 잭은 왕복 4시간 거리를 달려 양을 보살피러 간다. 잭은 이렇게 먼 거리를 왔다 갔다 해야 하냐며 불만을 토로한다. 에니스는 잭의 이야기를 듣고, 자신이 양을 보살피러 가겠다고 말한다. 에니스가 양을 보살피러 가야 하는 저녁, 두 사람은 술에 거나하게 취한다. 에니스는 술에 취해 텐트 밖에서 잠을 청하고, 잭은 추위에 떠는 에니스를 텐트 안으로 데려온다. 그리고 함께 눕게 된 밤. 두 사람의 마음은 일직선 도로에 던져진 듯 같은 곳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냥 하룻밤 지낸 것뿐이야, 난 동성애자가 아니야."
"미안해. 괜찮아."
마음이 통했던 밤이 지나고, 두 사람은 어젯밤의 모든 것을 부정한다. 둘 사이엔 사랑과 우정이 있었다. 잭과 에니스는 “난 동성애자가 아니야.”라는 말로 사랑이라는 감정을 흐리게나마 지워본다. 남자와 남자 사이에서 떳떳하게 남길 수 있는 감정은 ‘우정’뿐이었다. 두 사람은 선명히 남겨둔 ‘우정’이라는 단어에 기댄 채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목장 주인이 양에게 표식을 남기듯 ‘성별’이라는 표식으로 사람을 나누고, 대상의 행동을 평가한다. 잭과 에니스 또한 그 표식에 맞춰 자신들의 감정을 부정한다. 서로의 마음이 통했던 날을 부정하고, 이내 폭풍우가 찾아온다. 강한 폭풍우 속에 양들이 흩어지고, 양의 등에 남겨뒀던 표식이 반 이상 지워진다. 표식이 지워진 양들은 가려내기 힘들 만큼 섞이고, 고용주인 아귀레는 잭과 에니스를 해고한다. 잭과 에니스는 마치 표식이 지워진 양 같다. 잭과 에니스 사이엔 사랑이라는 감정의 폭풍우가 불고, 둘은 사회가 정해둔 ‘남자’라는 표식을 지운 채 마음을 섞는다. 그런 잭과 에니스를 보게 된 아귀레의 두 눈엔 혐오가 가득 차있다.
또 볼 수 있겠지?
잭과 에니스는 일을 마치고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게 된다. 내년에 또 만날 수 있을까? 지금 마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되돌릴 수 없게 되는 걸까? 잭과 에니스는 마음이 심란하다. 잭은 자신의 차를 타고, 에니스는 터덜터덜 걸어 아귀레의 사무실을 벗어난다. 운전을 하던 잭은 백미러를 통해 에니스를 바라본다. 점점 작아지는 에니스의 모습. 그리고 점점 작아지는 잭의 차가 지나간 길을 따라 걷는 에니스. 두 사람은 사회 속에서 떳떳하게 서로를 바라볼 수 없다. 그저 등을 돌린 뒷모습 또는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볼 수 밖에 없다.
서로를 잊고 지내는, 남들이 말하는 ‘평범한 삶.’ 잭은 농기계집 딸 루린을 만나 결혼하고, 에니스는 예정대로 약혼자 알마와 결혼한다. 부잣집 딸을 만난 잭은 부족함 없는 결혼생활을 하고, 에니스는 여전히 경제적으로 힘든 삶을 살고 있다. 하루하루 현실에 치여 잊어가던 사랑은 잭의 엽서를 계기로 다시 시작된다.
이제 우리 어쩌지?
정말 어쩌지? 사람들은 잭과 에니스의 사랑을 경멸할 것이고, 에니스가 어릴 적 봤던 그들처럼 험한 일을 당할 수도 있는데.. 잭은 “이제 우리 어쩌지?”라고 묻고, 에니스는 당장 먹고살기에 바쁘다고 답한다. 아이들을 먹여살려야 한다. 그러려면 사랑이란 감정에 빠져 허우적거리면 안 된다. 잭과 에니스는 현실과 사랑의 경계에서 ‘1년에 한두 번,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기’라는 타협점을 찾는다.
브로크백 산 덕분에 우리가 만난 거네
두 사람의 첫 만남을 맺어준 산, 그리고 유일하게 두 사람을 편견 없이 품어준 장소. 브로크백 산에서만큼은 잭과 에니스도 그저 ‘사랑을 하는 연인’이 된다. 이상한 소문이 날일도 없고, 동성애자라는 사실로 생명의 위협을 받을 일도 없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일 년에 한두 번밖에 볼 수 없다는 건 너무도 괴로운 일이다. 브로크백 산에서만큼은 너무도 행복하지만, 그 행복으로 1년을 버티는 건 쉽지 않았다. 잭은 에니스에게 함께 목장을 하거나, 같이 살 집을 마련하는 게 어떠냐고 제안하지만 에니스는 잭의 제안을 모두 거절한다.
남은 건 이 브로크백 산 뿐이야
에니스는 ‘가족을 먹여살려야 한다.’는 부담감에 눌려 잭의 제안을 대부분 거절한다. 하지만 잭은 계속해서 에니스를 기다린다. 일 년에 며칠밖에 없는 아주 특별하고 행복한 날. 잭은 에니스를 만날 생각에 콧노래를 부르며 와이오밍으로 향한다. 14시간의 장거리 운전. 아내 루린은 잭만 매번 먼 거리를 가는게 불공평하다고 말하지만, 잭은 에니스도 사정이 있어 못 오는 거라며 에니스를 감싼다.
에니스의 현실이 각박한 건 사실이다. 모아둔 돈도 거의 없고, 그의 아내는 잭과 에니스의 사이를 견디지 못해 이혼을 결심한다. 그리고 매달 125달러의 양육비를 보내야 한다. 감정을 내세우며 마음대로 행동하기엔 삶의 무게가 너무 무겁다. 그에 반해 잭은 돈 걱정 없이 아이를 키우고, 장인과 루린의 사업을 함께 진행한다. 잭은 에니스의 사정을 알고 있고, 이해하기에 오랜 시간 에니스의 뒤를 지킨다.
그렇게 20년이 흐른다. 에니스는 여전히 일을 해야 했고, 잭은 에니스의 뒷모습을 바라볼 뿐이다. 잭과 에니스의 사랑은 뜨겁게 불타다 재가 돼버린 장작처럼 파삭한 모습으로 변한다. 잭은 20년 전엔 양들을 보기 위해 떠나는 에니스의 뒷모습을 바라봤고, 지금은 이별을 고한 채 떠나는 에니스의 차를 바라본다. 잭은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에니스의 뒤를 바라보며 사랑했다.
잭은 가족들에게 자신이 죽으면 화장해서 브로크백 산에 묻어달라고 얘기한다. 잭은 39살의 나이에 죽음을 맞이한다. 에니스와 목장을 꾸려보겠다는 꿈을 이루지 못하고 말이다. 에니스는 뒤늦게 잭의 죽음을 쫓아 고향으로 돌아온다. 잭이 결혼 전에 쓰던 방. 잭의 책상엔 20년 전, 브로크백 산에서 에니스가 깎던 목각인형이 놓여있다. 그리고 잭의 옷장엔 두 사람이 헤어지던 해, 에니스가 야영지에 두고 온 셔츠가 걸려있다. 잭의 파란 셔츠는 에니스의 피 묻은 체크 셔츠를 고이 감싸 안고 있다.
에니스가 브로크백 마운틴에 찾아오지 않았던 다음 해, 잭은 브로크백 마운틴을 다시 찾는다. 일을 구하려고 했다기보단, 에니스가 또 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서였을 것이다. 그때였을까, 아니면 헤어지던 날이었을까? 잭은 다시 브로크백 마운틴을 올라 사랑하는 에니스의 체취가 담긴 셔츠를 소중히 안아들고 집으로 돌아왔을 것이다.
잭, 맹세할게.
에니스는 잭이 했던 것처럼, 둘의 셔츠를 들고 집으로 돌아온다. 집이라기엔 조금 초라해 보이는 트레일러. 얇은 옷장 문에 걸려있는 잭과 에니스의 셔츠. 이젠 에니스의 셔츠가 잭의 셔츠를 덮고 있다. 에니스가 잭을 감싸 안을 차례다. 에니스는 잭과의 기억을 안은 채, 평생 잭을 그리워할 것이다.
에니스는 잭의 죽음 이후로 잭처럼 사랑하는 사람을 기리며 살기로 다짐한다. 항상 ‘일을 해야 한다’며 미뤄온 딸과의 관계. 에니스는 딸의 결혼식을 위해 처음으로 방목일을 내려놓는다. 그리고 잭이 그랬듯, 사랑하는 딸이 두고 간 가디건을 정성스레 접어 옷장에 넣는다.
에니스는 평생 잭을 그리워할 것이다. 못다 이룬 사랑이기에 더욱 사무칠 것이고, 잭의 뒷모습을 보기보단, 먼저 등을 돌렸던 날이 더 많았던 것을 후회할지도 모른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게 왜 이리도 힘든 것일까. 잭과 에니스의 사랑은 여느 연인들과 다르지 않다. 당신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당신이 돌아오길 기다리고, 다시 만날 날을 헤아려보며 살아가는 하루하루. 명확한 이유도 없고, 딱 잘라 말할 수 없는 감정. 사람들은 잭과 에니스의 이런 감정을 인정해 주지 않는다. 넓은 브로크백 산만이 잭과 에니스를 조용히 감싸 안아준다. 이 산이 무너져내리지 않는 이상 잭과 에니스의 추억은 영원히 그곳에 남아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