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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oungmi May 05. 2023

모든일의 시작은 메일 한통으로부터

2022년 4월

어느 평범한 오후 


여느 날과 다름없이 회사 계정의 이메일을 확인하고 있었다. 쌓여 있는 업무 메일들 속에서 심장이 쿵쾅거릴 만한 제목의 메일이 눈에 들어왔다.



육아휴직 사용기간 확대안내

"육아휴직은 자녀 1인당 최대 2년을 사용할 수 있음. 시행일 이전에 육아휴직 1년을 모두 사용한 구성원이라도 만 8세 또는 초등학교 2학년 이하 자녀를 둔 구성원이라면 확대된 육아휴직 1년을 사용할 수 있음"




육아휴직 기간의 확대라니!!! 게다가 둘째가 아직 1학년이니 없던 육아휴직이 1년 생기는 셈이었다. 그 순간 해외 1년 살기를 떠올렸다.


외국에 나가서 살아보고 싶은 마음은 꽤 오래전부터 있어왔다. 처음 시작은 대학원 시절이었던 것 같다. 

학부를 졸업한 후 대학원에 진학했고 휴학이나 어학연수, 배낭여행 같은 그 나이 때 있을 법한 경험들이 없는 상태로 마지막 학기를 앞두고 있었다. 문득 이대로 졸업하고 취직을 하면 너무 억울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지하철을 타고 가는데 옆에서 외국인이 영어로 얘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때 문득 여기가 한국의 지하철이 아니고 외국의 지하철이라면 좋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마치 영화속의 장면처럼 한국의 지하철에서 외국의 지하철로 화면이 전환되는 상상을 해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대학원 마지막 학기를 남기고 휴학을 신청했다. 그리고 캐나다로 갔다. 캐나다를 선택한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많은 나라들 중에서 유독 캐나다에서 살아보고 싶었다.


그런데 막상 도착해서 어학연수 과정을 들으니 온통 한국 사람들로 가득했다.

‘이러려고 여기까지 온 게 아닌데’ 한국 수강생들과 어울리지 않으려 노력하며 자발적 왕따가 되었다. 

그리고 캐나다 현지인들과 좀더 가까이에서 어울릴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았다. 카톨릭 신자였던 나는 집에서 가까운 성당을 찾아 성가대, 기도 모임, 청년 모임 등 성당에서 참여할 수 있는 거의 모든 모임에 나가고 여행을 다니며 5개월을 지냈다. 마지막 돌아오던 날 성가대에서 과자파티로 송별회를 해주셨고, 신부님께서 송별회에 오셔서 안수를 해주셨다. 그렇게 너무나도 짧고 행복했던 5개월 간의 캐나다 생활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대학원을 졸업하고 취직을 했다. 회사에서 일을 하면서 영어에 대한 아쉬움, 영어로 자유롭게 말하고 싶은 열망이 조금씩 커졌던 것 같다. 입사하고 얼마안되어 옆 팀에 같은 시기에 입사한 친구가 영어로 업무 전화를 할 때, 해외 외주업체와 미팅이 잡히면 해외에서 공부했던 친구들이 회의 진행을 맡을 때 등등 그런 상황들을 볼때마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그렇게 지냈던 것 같다.


그런데 입차 10년차 정도 되던 해에, 영어로 유창하게 말하지못하는 상황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결정적인 경험을 하게되었다.


UX 관련 학회로는 규모가 가장 크고 영향력이 있는 해외 학외에 출장을 가게되었다. 회사에서 인공지능 AI 제품들이 하나 둘 출시되고 있는 시점이었고, 그 당시 참여하고있던 프로젝트 주제와 정확하게 일치하는 주제로 세미나가 예정되어 있었다. 세미나에 참석하면 회사에서 우리가 하고 있던 고민거리, 의문점들을 조금이나마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았고, 프로젝트 진행에 도움을 주는 무언가를 얻어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설레이고 부푼 마음으로 세미나에 참석했다. 스탠포드 교수님이 세미나 진행을 맡았고, 각국의 실무진들이 모였으니 분명 뭔가를 얻을 수 있으리라. 그런데 세미나는 시간이 지날수록 기대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펼쳐졌다. 스탠포드 교수님의 진행은 전혀 준비되지 않은 것처럼 매끄럽지 못했고, 참석한 사람들의 토론 내용도 기대와는 다르게 얻을 만한 내용이 거의 없었다. 그래도 우리가 고민하고 있었던 부분들을 나누면 뭔가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머릿속에서만 맴돌 뿐이었다. 




질문까지는 어떻게 하겠는데, 질문 이후에 논의되는 내용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어떻게 하지? 질문이 들어왔을 때 답변을 제대로 못하면 어떻게 하지? 질문 내용조차 이해하지 못하면 어떻게 하지? 결국 세미나 시간동안 한마디도 못하고 세션이 끝나버렸다. 제3자가 봤을 때 나는 아무 발언을 하지 않았으니 아무런 생각이 없는 사람일 뿐이었다.




그 날 이후로 영어로 자유롭게 말하고 싶은 열망이 폭발했던 것 같다. 어느 날 우연히 국내에서 대학을 나온 것이 확실한 어떤 신입사원이 영어를 굉장히 유창하게 잘해서 그 친구에게 물어봤었다. 어떻게 그렇게 영어를 잘 하냐고. 그 친구가 얘기하기를 초등학교 때 해외에서 2년 정도 학교를 다녔고, 그 때 익힌 영어를 지금까지 써먹고 있는 것 같더란다. 그 얘기를 듣고 역시 이렇게든 저렇게든 나는 늦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국내에서 열심히 노력해서 영어를 유창하게 잘하는 사람들도 많겠지만 나에게 영어로 자유롭게 말을 한다는 것은 잡으려고 해도 잡히지 않는, 넘어설 수 없는 아주 높은 벽 너머에 있는 것 같았다.  


언제부터 인가 나의 영어에 대한 열망은 아이들에게 그런 기회를 주고 싶은 열망으로 바뀌어갔다.




어느 날 밤 잠자리에 누워서 진지하게 생각해봤다. 아이들과 다같이 해외에서 거주해보고싶은데, 그러려면 회사를 그만둬야한다. 회사를 그만두었을 때 나의 커리어가 없어지는 건 견딜 수 없을 것 같고

그럼 무언가를 해야하는데, 해외 취업은 당장 영어가 안되니 불가능하겠고. 아이들이 초등학교때 나가는 게 시기적으로 가장 적절할 것 같은데. 그럼 지금 회사를 그만두고 박사과정에 들어가서 박사를 기한 내에 마치면서 영어공부를 하고, 포닥을 해외로 지원해서 애들을데리고 나가볼까? 몇 년 동안 영어공부를 하면 포닥은 어디라도 받아주는 곳이 있지 않을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생각을 이어가다가

이런 허무맹랑한 생각을 하다니

박사학위 학비가 얼만데

회사를 다녀야 돈을 벌지 

잠이나 자자




그렇게 해외 포닥과 해외 거주의 꿈은 곧바로 접어두었다. 그리고 열심히 회사를 다녔다. 

그리고 15년차 되던 어느 날 육아휴직기간 확대 메일을 받은 것이다. 내가 이상적으로 생각했던 그 시기에 회사를 그만두지 않고 1년을 쉴 수 있는 절호의 찬스가 찾아온 것이었다.


해외 1년 살기의 꿈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메일에서 "만 8세 또는 초등학교 2학년 이하 자녀를 둔 구성원이라면 확대된 육아휴직 1년을 사용할 수 있음." 이라는 문구를 읽었을 때 내가 얼마나 기뻤을 지 상상도 못할 것이다. 너무 기뻐서 마음속으로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바로 그날부터 해외 1년 살기 준비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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