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도 지지리도 없지. 심지어 돈을 주고 의뢰를 맡긴 일본 워킹홀리데이에서 보기 좋게 미끄러졌다. 나이 (당시 27살)때문인지 입국 진술서 내용이 부적합했던 것인지 모르겠지만 불발되었다. 다시 한번 자존심에 스크레치가 간 순간이었다. 그렇다고 회사까지 그만둔 마당에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었다.
한편, 당시 정부에서는 해외 인턴을 장려하던 상황이었다. 취업 준비할 때 일본 해외 인턴도 알아보았다. 하지만 일본 내 생활비를 감당할 수준의 지원금이 나오지 않아 접어두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상황이 달랐다. 회사도 그만두고 워킹까지 떨어진 마당에 물불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그 길로 (당시) 중소기업진흥공단에서 모집하는 2013년 하반기 중소기업 해외인턴십에 서류를 제출했다.
해외인턴십은 6개월 과정이며 서류전형, 면접전형, 온/오프 교육 이수, 현지 기업매칭 총 4단계를 걸쳐 최종 선발된다. 이번에는 다행히도 모든 과정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안산에서 합숙교육을 진행하는 동안 도쿄 오다이바(お台場)에 위치한 모 한인기업과 최종 매칭이 되었다. 지낼 곳은 도쿄 고토구(江東区)에 있는 한 셰어하우스로 정했다. 이곳은 일본인 집주인과 스카이프 화상면담으로 입주가 성사되었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2013년 9월 5일, 바퀴 달린 커다란 이민가방 하나와 사전에 신청해 둔 일본 가라케(피처폰)를 들고 도쿄로 향했다. 졸업여행 이후 2년 만의 일본행이자 첫 도쿄 방문이었다. 온통 일본어로 가득했고 들리는 말도 당연히 일본어였다. 막연히 언젠가는 일본에서 살아보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소원을 이루게 되었다.
일본 입국 후 3박 4일은 정신없이 도쿄 방방 곳곳을 돌아다녔다. 아사쿠사, 신주쿠, 시부야, 우에노 등 도쿄의 매력에 흠뻑 취한 관광객모드였다. 이곳에서 앞으로 인턴 6개월 동안 지내게 된다니, 모든 게 꿈만 같았다. 지난 몇 달간의 아픔은 금세 잊혔다. 매일 같이 걸쭉한 라멘을 먹고 시원한 나마(생맥주)를 마셨다. 사진을 찍고 블로그에 기록했다.
주말이 지나 첫 출근일 (9월 9일)이 밝았다. 주말에 사둔 도영버스(都営バス) 정기권을 사용해 오다이바까지 이동했다. 한국에서 첫 출근때와 마찬가지로 감색 스츄에 넥타이를 맨 하얀색 셔츠차림으로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팀을 이끄는 부장님을 포함해 한국인 직원 4명, 일본인 스텝 1명, 그리고 나와 같은 인턴생이 3명 더 있었다. 같은 회사로 파견된 동기생까지 더해지면 인턴만 5명이었다.
이곳에서 하는 일은 한국 중소기업의 일본 진출을 서포트하는 업무였다. 민간 코트라(KOTRA)와 같은 역할을 하는 곳이었다. 본사는 한인타운은 신오쿠보(新大久保)에 위치해 있었고 한인슈퍼와 한인식당 등을 운영 중이었다. 인턴 근무하는 동안 일본 시장조사나 각종 수출상담회 행사를 보조하는 역할을 맡게 된다.
회사구조나 업무 특성상 ‘한국어’ 사용 비중이 많았다. 일본어 프리토킹이 사실상 어려운 상태였기에 그나마 다행이었다. 어차피 사무실 밖으로만 나가면 온통 일본어고 일본사람이었다. 업무를 배우기 위해 열어본 이메일에도 일본어가 가득했다. 일본어 말문이 트이는 순간이 곧 오리라!
평일에는 인턴 업무를 수행하고 주말이면 관광객 모드로 바뀌었다. 꿈에도 그리던 일상을 만끽하고 있으니 하루하루가 너무 신나고 즐거웠다. 진작 오지 않았던 것이 후회될 정도였다. 매달 6만 엔 이상 하는 방 값에 식비까지 감당하기에는 기관에서 주는 생활 지원금이 턱없이 부족하기는 했지만 견딜 수 있었다.
언제나 즐거운 시간은 눈 깜짝할 사이에 흘러간다. 도쿄에 온 지도 금세 두 달 이상이 지나갔다. 제법 이곳 생활에도 익숙해졌고 업무도 하나, 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 무렵 수출 상담회 행사 준비도 한참이었다. 한국 기업과 일본 바이어가 매칭되어 비즈니스 상담을 하는 자리다. 인턴은 주로 바이어가 상담 스케줄에 맞게 행사장에 들어갈 수 있도록 안내하는 역할을 했다.
“노무라상, 상담시간이 되었습니다. 3번 테이블로 안내드리겠습니다.”
미리 머릿속에 외워둔 문장으로 일본인 바이어에게 말을 걸었다. 어려운 문장이 아니니 금세 말이 통했다. 보통은 알겠습니다(와카리마시타)로 답변이 돌아온다. 하지만 간혹 예상치 못한 질문이나 요청이 오는 경우가 있었다. 급한 전화가 있어 시간을 5분만 늦출 수가 있냐는 경우가 그러하다. 아직 머릿속에 충분히 레퍼토리가 정리되기 전이었다. 일본어 회로도 한국어에서 일본어로 전환이 필요한 때였다. 단순한 몇 마디 조차 제대로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다시 머리가 하얘지기 시작했다. 첫 회사에서 일본 바이어 미팅이 있던, 그날의 악몽이 다시 떠올랐다. 일본에 왔다는 기쁨에만 취해 있었고 이곳에 온 이유를 잊었던 것이다. 아차 싶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일본까지 갔다 와서도 (심지어 전공까지 하고) 일본어도 못하는 진짜 바보가 되겠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어떻게든 일본어를 정복하지 않으면 안 됐다. 적어도 일본어로 말문을 터야 한다. 일본인 앞에서 더 이상 굳어서도 안된다. 이미 인턴기간도 절반밖에 남지 않았다. 세 달안에 어떻게든 승부를 봐야 했다. 일본어 서바이벌이 시작된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