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생불량성빈혈에서 골수형성이상증후군까지]
앞에서 얘기했듯이 나는 2007년부터 혈액 관련 희귀난치성질환인 재생불량성빈혈과 함께 살아왔다.
최근 재생불량성빈혈을 검색해보니 이 병을 갖고 있는 환자들 중에 조혈모세포이식을 하는 환자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당시 이식을 하지 않고 면역억제 치료만으로도 거의 완치에 다다랐기에 운이 좋았다고 해야 했을까?
치료 후 다행히도 대학에 진학할 수 있을 정도로 건강을 되찾았고 남들과 다름없는 대학생활을 해 나갈 수 있었다.
다시 사는 인생을 응원해주기라도 하는 듯 혈액수치는 날로 좋아졌고, 대학 1학년 초만 해도 오르기 힘들었던 학교 오르막을 4학년 때는 그래도 가벼운 발걸음으로 오를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4학년 졸업을 앞두고 이른 취업을 하게 되었다.
나의 첫번째 직장은 종합사회복지관이었다. 그 옛날 ‘힘들어서 울고 있는 아이들에게 힘이 되어주고 싶다.’ 라고 다짐했던 말을 삶으로 실천하게 되었던 것이다.
종합사회복지관에서 근무하면서 외근도 많았고 야근도 많아 육체적으로 굉장히 힘들었지만 사회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라는 자부심으로 열심히 일을 했다. 다양한 팀에 소속되어 일하던 중 3년차에 나에게도 번아웃이 찾아왔고 과김히 퇴사를 결정한 후 나홀로 유럽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그래도 복지와 나는 떨어뜨릴 수 없는 관계라고 생각했기에 노인종합사회복지관을 거쳐 건강가정지원센터에도 취업하여 일을 했었다. 그러던 중 언제까지 직장을 옮기는 생활을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여 사회복지 공무원 시험에 도전하기로 했다.
본격적인 공부를 시작할 때 언니의 유방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간병할 수 있는 사람이 나뿐이었기에 잠시 공부를 접고 언니 간병을 하는 시기가 있긴 했지만 오히려 짧은 시간에 집중해서 공부하는 계기가 되어 10개월만에 시험에 합격하게 되었다.
나의 첫 발령 부서는 동주민센터였다. 너무나 감사하게도 동장님부터 동주민센터 직원들과 같은 팀 직원들까지 너무나 좋은 사람들이었기에 초반 2년은 정말 행복한 생활을 했다. 특히 나의 첫 사수는 나보다 나이가 어렸음에도 지혜롭고 업무능력이 뛰어나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그러나 사수가 타 부서로 발령받고 난 후 나의 직장생활은 어둠으로 가득해졌다. 새로 온 주임은 나를 이유 없이 미워하였고, 대화를 시도해도 무시하는 말을 하기 일쑤였다. 인간관계를 소중히 하며 갈등을 싫어했던 나는 관계를 개선하려고 어떻게든 노력하였으나 늘 물거품이 되었다. 몇 개월간 늘 가슴이 짓눌리는 상태로 출근을 하던 나도 지속된 괴롭힘에 참지 못하고 정면으로 충돌한 적이 있었는데, 그 날 이후로 그 주임은 나를 함부로 대하지 않게 되었다.
이 이야기를 하게 된 이유는 내가 겪었던 상황들이 혈액암 발병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해서이다. 몇 개월에 걸친 직장내 괴롭힘은 평일뿐만 아니라 휴가때나 주말에도 나에게 커다란 스트레스가 되었다. 100%라고 말하지는 못하더라도 그 당시 괴롭힘이 굉장히 큰 비율로 나의 면역체계를 비정상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두번째 발령받은 동주민센터에서는 모든 복지업무를 혼자 맡게 되었다. 대상자가 적다는 이유로 복지직 공무원이 1명만 배치되는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혼자서 잘 할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다. 매년 늘어나는 복지정책과 늘어나는 대상자들, 코로나 관련 업무와 복지행정업무까지 혼자서 맡다 보니 체력적으로 무리가 왔다. 또한 설상가상으로 대상자들의 과격한 민원과 위협으로 정신적으로 완전히 무너져버렸다.
회사에서는 업무에 집중하지 못하고 머리가 하얘질 때가 많아졌고, 집에 오면 침대가 아닌 책상 밑에 숨어 내일이 오지 않길 바랐던 때도 많았다. 나는 결국 정신건강의학과에 방문하여 우울증을 판정 받고 휴직계를 냈다.
복직한 부서는 업무가 매우 많은 동주민센터였는데, 직원들의 도움으로 업무를 차근차근 해내 갈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간 쌓였던 많은 스트레스 때문이었는지 암은 소리 없이 서서히 내 몸을 장악해가고 있었다.
2023년부터 급격히 혈소판이 떨어졌고 그에 따라 체력도 점점 떨어져 갔다. 2024년 유산 후 재임신을 위해 건강검진을 하던 중 혈액암 소견을 받아 다니던 대학병원에서 골수검사를 진행한 후 나는 두번째 사형선고인 혈액암을 판정 받았다.
직장내 괴롭힘도, 민원인들의 진상 짓들도, 과도한 업무들도 나는 왜 미련하게 참았을까?
모두가 말한다. 건강이 1순위라고. 그러나 건강은 잃고 나서야 그 중요성을 깨닫게 된다.
혈액암을 판정 받았을 때 나는 내가 살아온 삶을 후회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되짚어봤다. 그리고 다시 돌아간다면 지금까지 살아왔던 삶과 다른 삶을 살 수 있을지도 생각해봤다. 다 부질없는 생각이었다.
최근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에서 주인공 애순의 어머니가 영정사진을 찍을 때 애순의 할머니에게 한 대사가 있다.
“그래서 소풍이셨소, 고행이셨소?”
나는 이 대사 한마디에 무너져 울어버렸다. 나는 이 삶을 고행길로 느끼고 살아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젊을 때는 고생하는 것과 참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고, 오늘의 기쁨보다 늘 미래의 안정을 위해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정작 나는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즐거워하는지도 잊고 살아왔다.
그래서... 앞으로는 남은 삶을 소풍으로 기억되도록 살아가리라 다짐해 본다.
건강이라는 큰 것을 잃었기에 늦었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래도 아직 기회가 남아있으니 남은 삶을 작고 소소한 즐거움으로 채워 나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