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에 발행한 <다르게 사는 기쁨>이라는 글을 친구가 보고 거기서 언급한 식당에 가보고 싶다고 했다. 높은 곳에 위치한 고급 레스토랑에 혼자서 식사를 하다 겪은 에피소드를 소개한 글이었다. 얼굴이 화끈 거리는 웃픈 상황에서 내가 내린 결론 때문인지 친구는 식당이 몹시 궁금했나 보다. 모처럼 약속을 한 날이 하필 복더위! 한 시간 정도 공원길을 걸어 식당에 도착했다. 역시 오길 잘했다 싶을 정도로 한적하고 잔잔한 음악까지 운치를 더해주고 있었다. 예약을 하지 않았지만 운 좋게 바깥 풍경이 보이는 자리에 앉을 수 있었고 오늘은 혼자가 아니고 동행까지 있어 좀 더 당당하게 제대로 식사를 주문했다.
만나서 이야기가 술술 풀리는 친구와의 대화는 만나는 순간뿐 아니라 그 이후에 더 풍성해지기도 한다. 어디서 무슨 이야기를 풀어내야 할지 아무런 생각도 없는 가운데 파스타에 곁들여 나온 오이피클을 보는 순간 연상되는 열무 피클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경계도 없이 사방팔방으로 이어진다. 최근의 근황에 이어 오랫동안 존재하던 감정의 원인까지 들추어내며 시공을 넘나들며 다양한 인물들을 초청하며 총천연색 시네마스코프를 연출한다. 아! 이런 마술이라니.... 이야기에 빠져 있는데 한적하던 식당이 어느새 식사시간을 기점으로 만석이 되어 있다. 분위기 전환을 위해 자리를 옮겼다. 의외로 한낮이라 너른 공원이 한적하다. 나무 그늘 아래 벤치에 앉아 다시 몇 시간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이야기의 요점은 해결되지 않는 질투심이었다. 왜 나는 바라지 않는 질투심이 생기는 걸까? 심지어는 친한 친구의 기쁜 소식에 대해서도 진정으로 기뻐만 하기보다 질투를 하고 있지 않은가? 다시 말해 배가 아프지 않은가?
한참을 잘 들어주던 친구가 자기 이야기를 한다. “언젠가 함께 있는 사람이 날로 먹는 거 같아 배가 아픈 적이 있었어. 하는 일도 없으면서 분에 넘치는 대가를 지불받는다는 생각이었어.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내 정체성에 대한 확신이 부족했기 때문인 것 같았어. 내가 편안하고 별 불만이 없을 때는 타인에 대해서도 너그러워지는 것 같아. 혹시 너 지금 너무 힘든 것 아니니? 탈진상태라 주변이 다 그렇게 보이는 거 아니니?”
맞다. 너무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 내가 궁지에 몰리다 보니 여유가 없고 타인에 대해서도 여유가 없는 게 맞다. 함께 기뻐할 에너지가 없는 게 맞다. 좀 쉬어야 하는 시기인 것 같다. 맛있는 것도 먹고 의무에서 벗어나 나를 좀 쉬게 해야 할 시간이다. 내가 편하면 타인에 대해서도 너그러워지니까. 타인의 기쁨에 함께 기뻐해 질 수 있으니까.
열기로 들끓는 삶의 순간에 사막에 오아시스처럼 목을 적시는 생수 한 방울 같은 순간을 만날 때가 있다. 삶이 치열할수록 그 청량감은 대비가 된다. 혼자서 열기를 뚫고 험한 길을 걸어가는데 저 멀리 누군가의 파라다이스를 보며 함께 기뻐하지 못하는 내 속좁음이 나를 더 뜨겁게 하고 있다고 한탄하고 있을 때 그는 가만히 내 끝도 없이 이어지는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무엇보다 내 깊은 곳의 갈망을 알기라도 하는 듯 대부분 영혼 없이 대응하던 태도와 달리 내가 듣고 싶은 이야기를 친히 준비한 카드에 적어 전해주었다.
너의 새로운 도전을 성공적으로 마친 것을 축하해.
네가 말한 소망! 이루어지리라 기대해. 기도할게.
내가 예언자적인 기질이 있거든.
한여름의 낮 살짝 그늘이 진 공원의 벤치에서 순삭한 몇 시간의 대화였다. 더위에도 아랑곳없이 아름드리나무는 자리를 지키고 간간이 불어오는 바람을 흔들어 우리의 열기를 식혀주었다. 보기 드물게 늘씬한 참새들은 재재재재 무리를 지어 우리 앞을 서성였다. 결과와 상관없이 나는 괜찮다는 위로가 화선지에 서서히 스며드는 물감처럼 내 영혼을 채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