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식은 두부와 김치!
이번 프놈펜 출장 2개월 반. 요리 없이 살아보기로 했다. (➡관련 이야기) 썰기, 삶기, 굽기와 같이 아주 간단한 조리 이외의 요리는 주방에서 추방하기로 한 것이다. 요리 없이 살기로 결심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시간을 아끼고 싶다.
둘째, 깨끗하게 먹고 싶다. (Eat clean)
셋째, 낭비하고 싶지 않다.
간략하게 말하자면, 이곳에서의 내 생활이 단순해지기를 바랐다. 최대한 단순화해서 내가 새로이 결심한 일들에 시간을 조금 더 사용할 수 있기를 바랐다. 무언가를 '더' 하려면 기존의 일정에서 무언가를 덜어내야 한다는 말이니까. 24시간이 부족한 우리들이 무언가를 '더' 할 시간을 확보하려면 유일한 방법은 무언가를 '덜' 해서 그 시간을 탈환해 오는 것뿐이니까. 시간은 어떻게 해도 더 생기지 않는다.
요리 없이 살기. 이 원대한 결단으로부터 3주가 지났다. 그 경과에 대해서, 성과에 대해서, 그리고 더 잘 해내기 위한 새 결심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나는 아주 잘 먹고살았다. 요리를 멈춘 만큼 식탁에는 더더욱 좋아하는 것만을 올리기로 했다. 비록 내 손으로 장만해서 먹어야 하는 식사는 저녁 한 끼였지만, 그나마도 아주 즐거운 식사가 되기를 바랐다. 그리고 이 노력이 지속 가능해야 했기 때문에, 지치지 않고 계속 해내가기 위해서는 요리 없는 식탁도 즐거워야만 했다. 가장 좋아하는 식재료로 식탁을 꾸미기 시작했다.
처음 식탁에 올린 재료는 두부였다. 나는 콩으로 만든 모든 식재료와 요리를 사랑한다. 두부, 순두부, 유부, 두유를 향한 내 마음이란, 아주 흐뭇하고 따뜻하다.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순두부찌개. 그렇지만 그런 화려한 요리는 나의 누추한 식탁에 오를 수 없다. 그래서 올리기 시작한 것은 따듯하게 데운 두부다. 김치는 한인마트에서 샀다. 도마가 피 흘리게 할 수는 없으므로, 김치조차도 잘 잘라놓은 김치를 택했다. 하얀 접시에 먹을 만큼 담아 올리면 그만인 맛김치.
3분 만에 차릴 수 있는 상이지만, 먹을 때마다 감탄한다. 내가 좋아하는 두부! 이 맛! 다만 얼른 식어버리는 두부가 조금 슬퍼서, 어느 날부턴가 두부 삶은 물을 버리지 않고 두부와 함께 담아내기 시작했다. 처음 따듯한 물에 담긴 두부를 먹으면서 한참 감동했던 기억이 난다. 식사 내내 따뜻한 두부를 먹을 수 있는 점도 감탄스러웠지만, 무엇보다 두부 한 조각에도 정성을 더 들일 수 있고, 그 정성이 식사의 즐거움을 깊게 할 수 있다는 게 기뻤다.
두부에 대한 나의 사랑은 지치지 않는다. 진화를 거듭할 뿐. 조금씩 식재료를 갖추어 살게 되면서 사랑 또한 화려해져 갔다. 장을 볼 때 나름의 원칙을 정했는데, 거창한 것은 아니고 출장 기간 동안 다 소진할 수 없는 것은 사지 않기로 했다. 한인 마트에서 진간장 앞에서 한참을 서성이며 고심하다 내린 결론이었다. 결국 500ml짜리 진간장이 아니라 150ml짜리 캄보디아 간장을 샀다. 후에 나는 작은 캄보디아 간장을 보며 두고두고 뿌듯해하고 있다. 절제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기쁨은 소비에서 얻을 수 있는 기쁨보다 큰 것 같다. 풍부해진 식재료들을 바탕으로 식탁이 풍성해졌다. 좋아하는 채소를 두부와 같이 삶아서 함께 먹기도 한다. 브로콜리에 맛김치를 올려 먹으며 외국인들이 김치를 샐러드의 일종으로 소비하는 마음을 이해하게 되었다. 내 두부 사랑에는 차별이 없기 때문에, 편의점에 보이는 순두부를 사서 먹어보기도 했다. 간장 살짝 올린 순두부의 맛. 그 행복을 아는 내가 좋다.
다음으로 한동안 식탁을 지배한 주자는 고구마였다. 고구마 참 맛있지... 사실 나는 고구마를 먹고 싶었다기보다 두유를 맛있게 먹고 싶어서 고구마를 구워 먹은 쪽이었지만. 첫 고구마로는 한인 마트에서 한국 고구마를 사 왔다. 킬로 당 $5이었던가, 여섯 알을 샀는데 $9.5이 나와서 약간 놀랐다(쌀국수 두 그릇 먹을 가격). 예쁘니까 별 불평 없이 샀다. 숙소에 오븐이 하나 있어서, 한 번 사용해보고 싶기도 했고. 180도에 30분, 다시 150도에 30분을 구웠다. 갓 구운 고구마 세 알을 두유와 맛있게 먹고 나서 남은 고구마는 냉장고에 넣어두고 며칠간 조금씩 꺼내 먹었다.
주말 아침, 갓 내린 핸드드립 커피에 시원한 고구마. 그 맛. 강배전 커피와 군고구마는, 너무 잘 어울린다. 이렇게 한 끼 가볍게 먹고 숙소 헬스장에 올라가서 근력 운동을 하고 내려오면, 참 행복하고 근사한 토요일의 서막이 된다. 한국 고구마 달고 쫀득하니 맛있었지만 가격이 불만이어서 캄보디아 고구마를 사 보기로 했다. 가격은 한국 고구마의 1/3 수준이었고 속살이 노랗고 예뻤다. 수분기 적고 담백한 고구마였다. 간단한 샐러드를 만들어서 사다 놓은 빵에 곁들이기도 했다. 토마토와 양파, 마늘을 썰어서 소금과 라임 뿌리면 그 자체로도 근사한 샐러드가 된다. 여기에 고수나 바질, 오레가노, 파슬리 같은 향채나 허브를 곁들이면 바게트에 올려 브루스케타로 먹을 수 있고, 간을 좀 더 짜게 잡으면 (타코)소스로도 사용할 수 있다. 토마토 좋아.
세 번째 주자는 오트밀. 이때부터 열대 과일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과일은 맛있고, 준비에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기는 하는데, 주방에 날파리나 개미가 생길 수 있고 쓰레기가 많이 나와서 곤란하기도 하다. 마침 포멜로와 그린 망고, 잭 푸르트를 선물 받아서 상에 올리기 시작했다. (➡너무나 자주 인용되는 이 이야기) 오트밀은 준비가 매우 간단하고, 건강하고, 맛있다. 물론 물에 불린 종이박스 씹는 맛이라는 혹평도 간간이 들려오지만.
오트밀은 분쇄되어 있는 그로츠 오트밀과 압착 가공한 롤드 오트밀이 있는데, 나는 롤드 오트밀만 먹는다. 조금이라도 식감이 살아 있어서 더 맛있는 느낌. 톡톡. 그리고 오트밀은 우유나 요거트에 섞어 하룻밤 냉장고에 재워뒀다가 먹는 오버나이트 오트밀과 우유에 끓여서 먹는 오트밀 죽, 이 두 가지 형태로 많이 먹는다. 나는 오버나이트 요거트 오트밀을 좋아한다. 전날 밤에 요거트에 과일 몇 가지와 섞어두면 다음 날 아침에 먹을 수 있으니 간편하기도 하고, 끓여 먹을 때보다 톡톡 씹히는 식감이 더 잘 살아있어 좋다. 아침 식사로 산뜻한 요거트가 더 잘 어울리기도 하고. 오트밀 죽은 두유에 꿀을 넣고 끓였다. 아마 저녁 식사로 먹었던 것 같다. 시나몬 솔솔 뿌리면 완벽했겠지만, 시나몬 한 통 사서 다 먹을 리 없으므로... 그냥 시나몬 없이 먹는다.
같이 섞어 먹을 과일이 없을 때나 좀 더 바삭한 식감이 생각날 때는 오버나이트 오트밀에 그레놀라를 뿌려 먹었다. 맛있어...
나는 커피를 좋아한다. 직접 커피를 내려마시기 시작한 지 3년 정도 되었다. 고구마 1.8kg에 9달러는 비싸다고 느끼면서도, 커피 100g 9달러는 흔쾌히 써버리는 것이다. 아침마다 커피를 두 잔을 내린다. 한 잔은 내리자마자 마시고, 나머지 잔은 텀블러에 담아 출근길에 챙겨간다. 커피를 좋아하고, 다양한 커피를 접해볼수록 커피와 어울리는 음식이 생각보다 적다는 걸 느낀다. 커피는 따듯한 그 커피 자체로 완벽하다. 그래도 가끔 심심한 입을 달래고자 한다면, 달콤한 과일이 좋다. 가장 좋아하는 조합은 진하게 내린 커피에 달달한 파파야. 잭 푸르트도 의외로 합이 괜찮았다. 밤이면, 카페인이 없는 차를 마신다. 아직 여기서 디카페인 커피를 구하지 못해서 차를 즐기는 입맛은 아닌데 가끔 차를 내려 마시고 있다. 내려 마신다기보다는 티백 하나 우려 마시는 거지만.
요리 없이 먹고살아도 맛있게 먹을 것이 지천에 널렸다. 지금껏 왜 요리를 하고 살았을까? 이대로 요리 없이 먹고살아도 좋겠단 생각이 들었다. 물론 밖에서 사 먹는 밥이 절반을 넘으니, 집에서는 이렇게 간편하게 먹는 식생활이 유지되는 것 같기도 하다. 당초에 요리를 그만둘 이유라고 생각했던 세 가지 이유에 대해 나름의 성과들이 있었다.
요리를 그만두니 확실히 시간을 많이 아낄 수 있었다. 이전에는 저녁을 준비하고, 먹고, 치우는 데 90분 이상을 썼던 것 같다. 정성껏 요리하는 데 30분, 먹는 데 30분. 그리고 기름진 그릇들을 바라보며, 설거지를 미루고 미루다 겨우 해내는 데 30분. 지금은 준비하는 데 5분, 먹는 데 30분, 치우는 데 5분이면 된다. 절반도 안 되는 시간으로 식사를 해낼 수 있다. 물론 아낀 시간은 오로지 나의 것.
그렇게 아껴낸 시간으로 책을 읽고, 운동을 하거나 브런치에 이렇게 글을 쓴다. 절제에 능한 사람들이 어떻게 계속해서 쓸모없는 일들을 덜어내고 자신이 원하는 일에 시간을 집중해서 투자할 수 있게 되는지 알 것 같기도 하다. 나도 모르게 당연스레 받아들이고 습관적으로 하고 있는 일상의 잔일들을 줄여서 내가 정말 원하는 일에 시간을 써보니 이게 더 큰 행복을 준다는 걸 알겠다.
본 것과 같이 내가 사용하는 조리법이라고는 썰기와 삶기가 대부분이고, 가끔 고구마를 굽는 데 오븐을 사용한 게 전부다. 기름을 사용하는 요리는 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육식과도 멀어졌고 계란조차도 사지 않게 되었다. 그나마 동물성 식품을 먹은 게 있다면 단백질 보충을 핑계로 사본 삶은 오징어 정도다. 떠올려보니, 여기 와서 라면을 한 번도 사지 않았다. 식생활이 많이 건강해졌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음식물 쓰레기도 거의 나오지 않는다. 사진 속 그릇에 담긴 것의 99%는 뱃속으로 들어갔다.
여기에서 낭비란 꼭 금전적 낭비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지난 출장 돌아오는 길에 대단한 쓰레기 더미를 남기고 귀국했다. 1/3도 사용하지 않은 간장, 고추장, 된장, 참기름, 식용유, 고춧가루. 반쯤 먹은 오만둥이, 동결 유부, 떡볶이 떡. 엄청난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고 왔다. 그때 나는 나 자신에 대해서 대단히 반성하게 되었다. 내가 이렇게나 많은 쓰레기를 만들면서 사는 게 옳은 일이 아니라는 생각, 그리고 내가 이 모든 것을 소비해서 얻은 것이 크지도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깐 맛있는 식사 때문에 너무 많은 자원을 낭비하고, 너무 많은 쓰레기를 만들었다. 이번에는 기필코 그러지 않고 싶다. 최선을 다해서 나에게 필요한 만큼만을 소비하는 작은 사람이 되고 싶다. 그리고 지금 3주 간의 생활을 보면 소비량을 줄이는 데 있어서 큰 성과가 있었다.
본래 목표는 아니었지만 체중이 줄었다. 체중계가 없어서 검증할 수는 없지만, 거울을 보면 다들 알지 않는가. 거울이 아니더라도 알 수 있다. 전보다 가벼워졌다. 물론 이건 여기 와서 달리기를 더 열심히 하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달리기보다는 식사의 힘이 더 크게 작용했다고 믿는다. 생각보다 우리의 몸은 먹는 것에 훨씬 더 큰 영향을 받는다.
식사 시간은 오히려 더 만족스러워졌다. 요리를 그만두었지만, 나는 내가 먹는 것을 절제한다는 기분을 느끼지는 않는다. 실제로 맛있는 걸 참고 안 먹는 게 아니다. 오히려 내가 가진 시간으로 최대한 좋아하는 것들을 찾아 먹고 있다. 나는 아무것도 포기한 게 없다. 내 식사는 지금도 맛있다. 단순한 조리법만 거친 음식이라 어쩌면 투박한 음식이지만, 그 단순함도 음미할 수 있다.
그리고 요리를 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양이 계속 늘어나서 그런지, 늘 과식하는 편이었는데 이제는 내가 먹고 싶은 만큼을 준비하는 게 훨씬 쉽고 수월하다. 그러다 보니 식사 후로 과식으로 인한 불쾌감이 없다. 항상 편안하고 만족스러운 식사를 한다.
또 생각지 못하게 얻게 된 소소한 즐거움이 있다면, 이런 것들을 말할 수 있게다. 이제는 설거지 시간이 끔찍하지 않다. 음식물이 덕지덕지 붙어있고, 기름진 그릇은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 물로만 박박 헹구어도 충분히 뽀득한 그릇들. 자연히 주방이 깨끗해졌다. 예전엔 주방 바닥에 음식물이 떨어져 있거나 기름때가 생겨서 미끌거리기도 했는데, 이제는 주방이 늘 깔끔하다. 이제 내 주방에서는 오로지 커피 향만 풍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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