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이 내 글을 브런치에 올리지 말라고 이야기했다.
얼마 전 '진우' 작가님이 작성하신 '메이 브릿의 노래'(https://brunch.co.kr/@jay147/147)라는 글을 읽었다. 해외입양인의 뿌리 찾기에 대한 글이었다. 내가 파리에서 생활하며 만났던 해외입양인의 이야기와 비슷한 듯하면서도 꽤나 다른 이야기여서 매우 흥미로웠다. 나도 한번 '내가 만났던 해외입양인'을 주제로 글을 쓰기로 작정하고 '진우' 작가님께 비슷한 주제로 글을 써도 될지를 문의했고, 흔쾌히 오케이 해주셨다.
대략 세 편으로 나눠서 글을 쓰기로 마음먹고 글의 얼개도 잡았다. 첫 번째 부분을 정성 들여서 쓴 다음 몇 번에 걸쳐서 다시 읽고 고치며 퇴고도 마쳤다. 진우 작가님의 글에 등장한 해외입양인들과는 전혀 다른 인생사를 경험한 입양인에 대한 이야기를 써서 브런치에 공유하면 해외입양인의 인생에 대해 좀 더 긍정적인 인식을 심어줄 수도 있을 거 같다는 주제넘은 자신감에 우쭐해졌다.
우리 가족이 2014년부터 프랑스에 거주하는 동안 둘째 딸 호지와 그 입양인의 첫째 딸이 친구가 된 것이 모든 이야기의 시작이었다. 그 이후로 우리 가족과 그 가족은 둘도 없는 단짝이 되었다. 3년의 파리 생활 동안 생활과 감정을 공유하며 서로가 서로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파리를 떠나 한국으로 귀국하면서도 그 가족과 헤어진다는 것이 너무나도 아쉬웠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할 정도이다.
하지만, 글을 다 쓰고 나니 약간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무엇보다도 그 가족과의 이야기는 둘째 딸 호지와 그 집 첫째 딸 이야기가 주축이 되어서 시작되어야 하는데, 호지가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지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둘째는 평소에도 자신의 사생활이 밝혀지는 것을 딱히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내가 브런치 활동을 시작하면서 가족들과 합의한 브런치 보도지침(https://brunch.co.kr/@hobiehojiedaddy/15)에 따르면 이 글은 무조건 호지에게 사전 검사를 받아야 하는 글이었다.
글을 다 써놓은 후, 저녁 식탁에서 호지의 눈치를 살펴보니 그럭저럭 기분이 좋아 보였다. 이 때다 싶어서 글의 취지와 내용을 짧게 설명하고 내가 써놓은 첫 번째 부분(퇴고까지 다 마친 최종 원고)을 호지에게 보여주었다. 글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이름도 모두 가명으로 바꿨으니 호지가 크게 탐탁지 않게 여기지는 않으리라 생각했는데... 오산이었다. 글을 읽어 내려가는 호지의 얼굴이 점점 안 좋아지기 시작했다. 다 읽고 난 호지는 단호했다.
"아빠. 이거 브런치에 올리지 마."
성공적인 해외입양인의 삶을 소개하고 싶다는 내 글의 취지도 설명하고, 혹시나 해서 등장인물이 이름도 모두 가명으로 바꿨다고 설명해도 호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자신과 그 입양인 가족의 사생활이 너무 많이 노출되는 게 싫다는 거였다. 옆에서 듣고 있던 첫째 호비마저 한마디 거들었다.
"그러게 글을 쓰기 전에 미리 우리한테 허락받지 그랬어?
그랬으면 이렇게 고생해서 써놓고 못 올리지는 않았을 거 아냐?"
나참, 이게 위로인지 아니면 약 올리는 건지... 그래도 나는 마지막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몇 마디 더 말을 이어가려고 하는데, 바로 그 '단어'가 아이 입에서 나온다.
"아빠, 약속은 약속이야."
하아... 아이의 입에서 '약속'이라는 단어가 나왔다. 이쯤 되면 게임 끝이다. 더 이상의 저항은 무의미하다. 이 글을 브런치에 올린다면 나는 '약속을 지키지 않는 아빠'가 되는 것이다... 옆에서 듣고 있는 아내에게 구원의 눈짓을 보내보지만, 아내는 입을 꾹 다물고 있다. 이미 패색이 완연한 나를 지지할 이유가 전혀 없다. LG를 응원해야지 왜 쓸데없이 한화를 응원하겠는가?
그렇게 나는 3:1로 완패했고, 내가 정성 들여 써놓은 글은 그대로 '작가의 서랍'에 파묻혔다. 잠시 화가 나서 글 전체를 삭제할까도 생각했었는데, '혹시라도 시간이 지나면 호지의 생각이 바뀔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작은 희망 때문에 차마 삭제하지는 못했다. 초보 작가의 창작욕을 무참하게 짓밟은(?) 나의 아내와 두 아이들은 이제 각자 자기 방으로 돌아갔고, 나만 서재에서 쓸쓸하게 이 글을 새롭게 쓰고 있다. 해외입양인에 대한 이야기는 브런치에 올리지 못하지만, 해외입양인에 대한 이야기를 썼다는 기록만이라도 남기고 싶어서이다.
자기 검열도 모자라 회사 눈치에 가족 눈치에 정말 시어머니가 열두명은 되는 이 신세로는 이번 생에서 진정한 작가 되기는 틀려먹은 거 같다. 브런치 시작하면서 괜히 가족들에게 허락받고 글 올리겠다고 약속한 것 같다는 후회도 몰려든다. 그렇다고 '약속'을 깰 수도 없고... 애초부터 '보도지침' 따위에 동의하는 게 아니었나 보다. 에휴... 입양인에 대한 글을 쓸 때는 흥도 나고 의욕도 충만해서 여러 번 읽고 정성 들여서 퇴고도 했는데, 이 글은 쓰면서 힘도 빠지고 퇴고할 의욕도 없다...
희망차게 시작했던 작가 지망생의 하루가 상처투성이가 되어 저물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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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hoto by Larkin Hammond on Unsplash.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