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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도호도 Oct 10. 2022

50cc 스쿠터가 주는 해방감

제주살이 49일차 2022년 9월 18일

어제 인생을 건 서핑 이후 천근만근이 된 몸을 이끌고 차귀도로 이동, 오후에는 배낚시도 했었다. 내가 생각해도 피곤이 쌓이는 스케줄이었다. 걱정했던 뱃멀미 대신 배 졸음을 무지하게 겪었으니 말 다 했다. 오늘은 그만 쉬어야 했다. 그래서 스쿠터를 빌렸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바퀴 달린 의자 위에서 가만히 앉아 있고만 싶었다.


사실 정말 타고 싶은 건 오토바이였다. 나는 지금보다 더 철이 없던 20대 극초반 시절, 영화 <분노의 질주>를 보고 난 후 오토바이를 타고 학교를 다니겠다고 선언한 적이 있었다. 주변 어른들에게 호되게 혼나고 타보진 못했지만... 그때 운전대도 못 잡아 본 것이 한이 되어 바로 오늘, 스쿠터를 빌리게 되었다.


숙소 앞으로 스쿠터를 배송시켰다.(스쿠터도 배송이 되다니! 역시 우린 배달의 민족이었어...!) 나는 이제 제 목숨 하나 소중히 여길 줄 아는 현명한 어른으로서 앙증맞은 50cc 스쿠터를 대여하였다. 24시간 대여에 배송료, 보험비까지 55,000원을 결제했다. 가성비가 떨어지는 소비였음에도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아까운 것은 그깟 스쿠터, 그냥 타면 될 걸 집안 어른들 반대로 여태 못 타고 '언젠가...'만을 되뇌던, 지나가 버린 시간이었다.



경치가 좋기로 유명한 신창 풍차 해안도로로 향했다. 푸른 바다를 옆구리에 끼고 따스한 햇살을 맞으며 여유롭게 달리는 나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그러나 현실은 매서웠다. 해안가는 태풍의 영향으로 '나 정말 바람났어!'를 노래하고 있었다. 최대 시속 50km로 가속을 해야 겨우겨우 바람을 뚫고 앞으로 나갈 수 있었다. 타타타 타탁- 바람에 옷이 펄럭여 제 한 몸 가누기도 힘들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종이인형이 된 듯한 느낌을 받았다.


혼자 돌고래 소리를 지르며 해안도로를 달렸다. 신나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고 기분이 오묘했다. 바람이 휘몰아 치자 스쿠터가 살짝 휘청였다. 입을 꾹 다물고 다시 운전에 집중하였다. 이건 로망 실현이 아니라 서핑에 이은, 또 다른 서바이벌 게임이었다. 모래가 바람에 실려 돌아다녀 눈이 너무 따가웠다. 결국 중간에 해안도로를 빠져나왔다. 차가 많이 안 다니는 고요한 시골길로 방향을 틀었다. 그렇게 다음 목적지인 애월읍에 도착하였다.


새로운 숙소에 체크인을 하고 침대에 눕자마자 곯아떨어져 버렸다. 한 숨 자고 일어나니 벌써 해가 저물어 가고 있었다. 이왕 24시간 대여한 거, 저녁에도 스쿠터가 타보고 싶었다. 주섬주섬 다시 헬멧을 쓰고 굳이 더 먼, 왕복 30분 거리 마트에 다녀왔다. 아뿔싸, 퇴근길 행렬에 끼어버렸다. 어두운 밤길+퇴근길 콤보는 미숙한 초보 운전자인 나에게 엄청난 도전이었다.


차가 많아지자 심장이 조금 떨렸다. 그래서 사람이 없는 인도로 달렸다.(인도가 차도와 화분 하나로 구분되어 있어 왔다 갔다 하기 편했다.) 어들기 못해서 좌회전 신호 놓쳤을 땐 우회전하는 척 은근슬쩍 횡단보도 앞으로 갔다. 그리고 보행자 신호에 길을 건넜다. 하하하, 뭐든 다 방법이 있는 거다.


마트에서 숙소로 되돌아가는 길엔 용기를 내어 차도로만 달려보았다. 그런데 이게 웬걸? 옆의 차들이 쌩쌩 달리는 것에 금방 익숙해졌다. 나도 모르는 새 내가 최대 시속 50km를 자연스럽게 달리고 있었다. 심지어 내 50cc 스쿠터가 너무 느려 답답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능숙하게 숙소 앞에 스쿠터를 주차하였다. 하루 사이에 스쿠터를 자전거 같이 자연스럽게 탈 수 있게 되었다. 뿌듯함에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그동안 뭐하느라 바빠서 이거 한 번 안 타본 건지... 거 참! 이렇게 쉽게 자유로움을 만끽할 수 있는 방법을 진작에 알았다면 참 좋았을 텐데. 역시 뭐든 경험을 해봐야 한다.(적어도 나는 그렇다.)


(비록 대여이지만) 나의 생애 첫 스쿠터 vino 50
'이동의 자유-스쿠터' 스킬을(를) 획득하였다! 인생 경험치(이)가 +10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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