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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도호도 Aug 22. 2022

제주도, 게하 스텝과 여행자 사이의 애매한 경계에서

제주살이 5일차 2022년 8월 5일

나는 제주도에 놀러 온 게 아니다. 내가 해보지 못한 경험을 하기 위해 왔다. 그래서 게하 스텝 지원을 할 때 오히려 일을 많이 하겠다는 의지를 내비쳤다.(계약한 시간 외로 일을 더 하면 최저시급으로 계산해 소정의 아르바이트비를 주는 선택지가 있었다. 가게 사정상 일을 적게 하게 되어 그 선택지는 사라졌지만 말이다.) 그런데 입도한 지 불과 5일 만에 나의 결심이 흐릿해졌다.


나의 근무시간은 저녁 6시부터 밤 12시까지. 두 사장님이 운영하는 가맥집의 오픈과 마감을 함께한다. 하는 일은 주로 서빙으로 아르바이트 경력 8년인 나에겐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게 문제다. 어렵지 않다. 도전적이지 않다. 손님이 부르지 않으면 특별히 할 일이 없으니 자꾸 딴생각을 하게 된다.(나의 mbti 중에 제일 바뀌지 않을 것은 E도 아니고 J도 아닌 N일 것이다. 아무 생각 안 하는 건 도대체 어떻게 하는 거야.)


6시간의 근무 중 9시부터 10시까지는 나에게 가장 고비인 시간이다. 손님들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 추가 주문이 없고 나는… 너무 졸리다. 그래서 잠과 지루함을 쫓을 겸 같이 일하는 직원 언니와 스몰톡을 했다. 그게 자연스럽게 롱톡으로 이어진 걸 우리만 몰랐다.


멀리서 홀 담당 사장님이 달려오시며 “손님이 계속 부르는데 지금 뭐하시는 거예요. 한 명은 여기, 한 명은 저기 서 있어야 한다고 말했잖아요.”라고 하셨다. 나긋나긋 친절한 사장님의 처음 듣는 단호한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무급이라 돈을 받진 않지만 난 숙식제공을 받고 있었고 그에 맞게 교환한 나의 노동력을 제공해야 했다.



많은 사람들이 '제주 한 달 살기'라는 로망을 실현하기 위해 제주도로 찾아온다. 그리고 무급이지만 숙식제공을 해주는 '게하 스텝'이란 제주만의 특별한 고용제도는 그 로망을 실현하기 아주 좋은 수단이다. 성수기에 바짝 돈을 벌어야 하는 자영업자들에게도 여차저차 새로운 경험을 하고 싶은 사람들에게도 윈윈인 괜찮은 제도라고 생각한다. 서로가 약속한 조건을 지킨다면 말이다.


내가 묵는 곳의 사장님들은 4년 간 게하와 식당을 운영하며 고생을 많이 하셨나 보다. 근무 첫날, 나와 함께 싸인한 계약서에 적혀있는 세부사항들이 그 증거였다. ‘이런 것까지 적어둔다고?’ 싶을 정도로 눈이 휘둥그레지는 것들이 있었지만 집 나오고 그간 내가 겪은 사람들을 생각하니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계약서의 세부사항은 서로를 보호하기 위한 안전장치였다.



옥상에 빨래를 널고 방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숙소 마당에서 아이스크림 봉다리를 들고 유유히 걸어가는 할머니와 마주쳤다. 당황스러워서 주춤하다가 수줍게 "안녕하세요" 인사를 건네니 할머니께서 "니 이거 무글래?" 하시며 바밤바를 건네주셨다. 그리곤 대문 옆의 돌담 아래 받쳐놓은 벽돌을 딛고 담을 넘어 옆집으로 들어가셨다.(???) 멍하니 쳐다보는 나에게 옆집 할머니는 허허 웃으며 이 집을 가로질러 다니면 마트가 가까워서 집주인(게하 사장님들)에게 말하고 왔다 갔다 하신다고 하셨다.


제주도는 경계가 흐릿하다. 집집마다 돌담이 하나씩 있으면서 높이가 허리 아래까지 밖에 안 와 집 안이 훤히 보인다. 문 앞엔 나무 세 개만 걸쳐 놓는다. 심지어는 그 나무 세 개로 집주인이 집 안에 있는지, 잠깐 나갔는지, 멀리 나갔는지도 알려준다. 심지어는 노는 땅과 건물을 가지고 계신 제주도민 분들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5년 간 무상임대를 해주는 문화도 있다고 한다.(건물이라고 했지만 허름한 주택이라 재건축을 어느 정도 해야 한다. 나갈 때는 권리금 없이 리모델링된 건물을 그대로 넘겨야 하는 것이 룰. 하지만 서울에선 정말 상상도 할 수 없는 문화인걸?)



눈에 보이지 않는 선은 지키기 참 어렵다. 더욱이 제주처럼 시골스러운 분위기의 동네라면 말이다. 게하 스텝과 여행자의 애매한 경계에서, 나는 오늘도 저녁 6시 10분 전부터 게하 스텝으로 마인드 세팅을 한다.(농땡이 치다 쫓겨나면 갈 곳이 없다.) 곧 휴일이니 그땐 자유로운 여행자로 제주도를 만끽해야지.



봐도 봐도 신기한 제주도 돌담. 태풍이 불어 문짝이 날아가도 돌담만은 무너지지 않는다. 구멍이 송송 뚫린 화강암 사이사이로 바람이 빠져나가서 그렇다고 한다.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인 용천동굴과 당처물동굴이 있는 마을, 월정리.(동굴은 보존을 위해 일반인 출입 금지이다.) 혼자만의 시간을 갖기 위해 제주도로 온 나에게는 정말 딱인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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