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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술호근미학 Aug 06. 2016

백남준은 왜 TV로 작품을 만들었을까? (후반부)

백남준 전, 플럭서스, 권력, 조지오웰

백남준 10주기 추모전 백남준과 플럭서스, 서울 시립미술관


햇볕이 살을 태우려고 작정한것 같던 7월의 아홉째날, 명동의 한 커피숖에 앉았다. 이 더운날 무엇을 할까 고민했다. 이 더운날 여기까지 나왔는데 꼭 미술관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혀 논리적이지 않지만..) 하지만 나와 같이 차를 마시던 상대는 현대 미술에 나만큼 흥미가 있지 않았다. 그는 애니메이션을 좋아했다.

"서울 시립 미술관에 지금 드림윅스 전시회가 열린대. 거기에 가보자. 슈렉, 쿵푸팬더, 마다가스카 같은게 있대." "쿵푸팬더..?"

그렇게 상대를 설득해서 이끌고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관을 방문했다. 백남준전과 천경자전이 있다는 사실은 뒤로 한 채 말이다. (참고로 드림윅스 전시회는 유료이고, 백남준전과 천경자전은 무료이다.)

못 다 끝낸 이야기


주말이어서 그랬을까? 드림윅스전은 사람들이 많이 붐볐다. 티켓을 구매하고 나서도 10분이상을 기다려야만 했다. 지금이다 싶어 기다리는 동안 백남준전을 보러 가자고 설득했다. 기다리는 동안 딱히 할 일도 없고 백남준이라는 이름 있는 예술가의 전시이기에 상대도 흔쾌히 동의했다.

백남준의 전시는 2층에 마련되어 있었다. 계단을 올라 가는 길에 백남준 전 안내문을 보니 문득 작년 말 못다 끝낸 이야기가 갑자기 생각났다. 백남준과 조지오웰이 바라본 미래에 대해 글을 시작했지만, 마무리를 짓지 못했다. 작가의 서랍에 넣어둔 그 글을 반 년이 넘어서라도 마무리 지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백남준은 왜 TV로 작품을 만들었을까? (전반부) https://brunch.co.kr/@hogeunyum/28  


조지오웰의 예언: 빅 브라더


매스미디어가 발달하고 난 이 후, 조지오웰의 예언이 조금씩 들어맞기 시작했다.

매스미디어는 사람들을 장악해 나갔다. 그들은 영화와 드라마, 쇼 등을 통하여 사람들이 부러워할만한 영상들을 제공했다. 사람들은 현실의 자신과는 다른 세련되고 멋진 허구의 캐릭터에 열관한다. 그들은 캐릭터의 옷을 따라입기 시작하고 그들의 언어를 복사한다.이러한 일들이 지속됨에 따라 사람들의 언어는 축소되었고, 티비를 보지 않으면 유행어를 몰라 대화가 통하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사람들의 모든 기준은 이제 현실 속 나의 모습을 부정한 허구의 '시뮬라크르'가 되었다. 그들은 작품 속에 나오는 사랑을 꿈꾸며 미디어가 제시해주는 기준을 사회적 성공의 기준으로 삼는다. 그리고 미디어에서 제시하는 기준을 만족시키지 못하는 주체를 실패자로 몰았다.


관련글: 앤디워홀의 그림은 왜 비쌀까? (앤디워홀) https://brunch.co.kr/@hogeunyum/5


한 편으로 티비는 정치적 교화의 목적으로 사용되어졌다. 수많은 나라의 정부들은 정권에 유리하게 미디어를 탄압했다. 그들의 뜻과 벗어나는 방송에는 규제를 가했다. 실제로 우리나라에서도 우루과이 라운드 협상시 피해가 예상되는 농민들을 위주로 한 방송을 제작하였음에도, 국가의 정책과 어긋난다는 이유로 방영을 금지한 적이 있었다. (이에 MBC 노동자들은 파업을 했고 주동자로 손석희가 구속되었다.)

https://youtu.be/nA7IO98XvkU

5.18에 대한 해외 언론과 국내 언론의 차이 (본인의 정치적 견해와 아무관련이 없습니다.)

이 시대의 미디어는 절대적인 권력이었다. 시청자들은 선택이 없었다. 매스미디어에 의한 시각적 폭력은 고스란히 사람들의 기억과 철학이 되었다. 매스미디어는 사람들의 생활을 통제하고 이끌었다. 민주화 운동이 간첩들과 공산당이 벌인 반란으로 방송 되면 그 방송을 본 사람들은 그것을 반란으로 인식했다. 진실은 매스미디어에 의해 감춰지고 왜곡 되었다. 전파는 집마다 있는 TV에 같은 장면을 보여주었고 같은 화면을 본 사람들은 모두 같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백남준의 예언: 케이블, 그리고 인터넷

전파의 속도를 나타낸 백남준의 작품

그러던 매스 미디어가 조금식 분열되기 시작한다. 한 가지의 목적을 지향하는 공동체들은 케이블 방송국을 개설하고 각자의 취향에 따른 프로그램을 방송하기 시작한다. 음악전문 채널, 스포츠 전문 채널, 정치 전문 채널등 "전문채널"들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재밌는 것은 이러한 전문채널들이 그동안 존재하던 공영방송국과는 다른 의견을 내기도 한다는 점이다. 그렇게 되면서 사람들은 더 이상 공영 방송을 100% 신뢰하지 않게 된다. 이러한 가운데 시청자들은 무엇이 사실인지에 대한 토론들이 오가기 시작한다. 인터넷이 발달함에 따라 수많은 사람들은 프로그램의 게시판에 그 프로그램에 대한 의견을 낸다. 방송에 대한 피드백이 오가는 것, 백남준의 예언이 들어맞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방송은 집단이 주도하는 프로그램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결국 시청자들은 이 집단이 옳은 것인가, 저 집단이 옳은 것인가 판단하는 객체이지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는 주체는 아니었다.


1인 미디어: 완벽한 주체


백남준전에서 나의 흥미를 가장 끈 작품이 있었다. 부처상이 카메라 앞에 앉아 있고 이모습이 바로 TV로 전송되는 장명이 연출되어 있었다. 마치 비디오 카메라 가전제품을 파는 곳에 가면 카메라에 비추는 것이 바로 옆 모니터로 전송되는 모습이었다.

백남준은 이 작품을 통하여 어떤 것을 말하려고 했을까? 종교를 나타내는 부처님상이 혼자서 카메라에 찍히고 TV에 출연하는 이 모습... 마치 아프리카, V앱, 유튜브 등의 1인 미디어를 보는 것 같았다.

백남준은 미디어의 끝은 1인미디어라고 생각한 듯 하다. 그의 이 작품처럼 이제는 단체가 아닌 개인이 직접 방송 콘텐츠를 제작하여 자신의 생각을 방송으로 담아낼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방송을 하는 인물들은 이름 앞에 "갓(god)"이 붙어 "갓철구", "갓대도서관" 등으로 불린다. 장난으로 붙이는 '신'이지만 그들의 방송을 보고 웃고 즐기고 논란을 일으키는 것은 흡사 종교와 비슷하다. 이것을 백남준은 예상하고 있었던 것 같다.


선택


방송의 무서움은 시각과 청각을 마비시키면서 추상적인 사유를 제한한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방송을 보고 듣는대로 머리에 입력 한다. 그것이 무슨 이유 때문인지 정말 맞는 말인지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웃고, 울고, 이해한다. 그리고 그것이 삶의 잣대가 되어진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비슷한 꿈을 꾸고, 비슷한 시기에 직업을 갖고, 가정을 꾸린다. 남자는 포르노적인 섹스를 꿈꾸고 여자는 드라마적인 삶을 원한다. 삶에는 때가 있고 "기본적인 삶"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왜 그래야 하는지도 모르고 말이다. 그저 그들은 미디어에 비춰진 콘텐츠에 동의했을 뿐이다. 미디어는 우리 삶을 주도해왔고 교육해 왔다.

하지만 이제는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우리는 공영방송, 케이블, 1인 미디어 모든것이 공존하는 세계에 살고 있다. 우리는 백남준의 예언처럼 피드백을 주고 받을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방송과 방송을 비교할 수 있다. 채널을 돌릴 권리가 있다. 원한다면 내가 직접 방송을 할 수 있는 시대에 산다. 동의할 수 밖에 없없던 때는 지났다. 동의를 할 것인가 말것인가의 시대이다. 당신은 어떻게 살고 싶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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