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도시를 만들고...>, <그들은 그 집에서 무슨 꿈을 꾸었을까>
p7
"건축은 사회를 답는다"는 말이 있다. 집이, 건물이, 일을 하거나 삶을 영위하는 공간이 궁극적으로 사람을 담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위해 만들어진 공간에서 사람과 사람이 만나며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p25
시장이 바뀌는 등 우여곡절 끝에 서울시의 뉴타우 사업은 끝없이 표류하고 있다. 물론 예상치 못한 경제위기로 인한 타격이 크긴 하지만, 사람들의 기대치에 크게 못 미치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일부 뉴타운 지역의 원주민들은 지구 지정 철회 소송을 제기하고 있고, 은평뉴타운은 원주민 재정착률이 15~20%에 불과하다고 한다.
p51
마치 건축을 배운지 얼마 되지 않은 학생이 주어진 조건을 직설적으로 해석해 히죽거리며 만들어놓은 그림 같은 BIG의 작업이 세상의 이곳저곳에 세워지는 현실은 무척 당황스럽다. (...) 나는 이 또한 시대정신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 마치 아이처럼 복잡한 인간사에 간섭하지 않고 제멋대로 세상을 즐기고 싶다는 21세기의 시대정신은 이렇게 만들어지고 있나보다.
p57
사람이 다르고 인생이 다르고 추구하는 목표가 다르지만, 결혼식만큼은 그 과정과 형태와 자세가 모두 판에 박은 듯 비슷하다. 그리고 그 과정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세계여행을 다니면서 그 나라에서 하는 결혼 예식에 맞춰 간소하게 결혼식을 올리는 생각을 했다.)
p61
진부함에 대한 거부, 새로움에 대한 열망이 어느새 또 다른 클리셰가 되는 것을 우리는 언제나 경계해야 할 것이다.
p71
상업주의가 싫어서 거리에 그림을 그리는 사람의 작업이 다시 비싼 가격으로 팔리고, 그가 이 시대의 가장 중요한 화가로 추앙받는 사실이... 어쩌면 이런 비뚤어진 물신숭배의 적나라한 단면을 우리 모두가 실소를 머금은 채 쳐다보게 하는 것이 뱅크시의 진정한 의도인지도 모르겠다.
p90
"삶은 언제나 예측불허, 그리하여 생은 그 의미를 갖는다." 일들이 뜻하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 놀라거나 괴로울 때마다 위안 삼아 떠올리는 이 대사는 신일숙의 만화 <아르미안의 네 딸들>에 나오는 말이다. 말하자면 인생은 알 수 없는 것이라는 얘기지만, 뭔가 멋지게 들리지 않는가?
p167
사람들은 점점 서울 외곽으로 떠밀려가 저녁이 되면 피곤한 얼굴을 하고 신도시로 향하는 급행버스나 전철에 몸을 싣는다. 오랜 시간 쌓아온 연륜과 역사의 기억을 지우고, 낮에는 가득 찼다가 밤에는 텅 비어버리는 어둠의 도시, 다만 값비싼 주상복합건물의 몇몇 불빛만이 찬란한 도시로 만드는 것, 그것이 우리가 꿈꿔온 진정한 서울의 모습은 결코 아닐 것이라고 믿고 싶다.
p179
배기형은 건축이란 형태를 만들고 모양만 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는 형태를 이루는 그 안의 골격이라고 생각했다.
p188-189
입구를 찾아 들어가면 계단이 나오고, 그 계단을 올라가면 네모난 건물의 중앙이 커다랗게 비어있음을 알게 된다. 하늘에서 들어오는 빛이 거대한 빈 공간을 채우고 있다. (...) 사람들은 혼란스런 입구를 통해 밝고 높은 실내로 들어온다. 그리고 어두운 서가에서 책을 꺼내들고 밝은 창 쪽으로 가서 책을 읽는다.
"도서관은 어두운 곳에서 책을 뽑아서 밝은 곳에서 읽는다."
도서관에서 책을 읽는 행위, 지식을 추구하는 행위는 어둠에서 밝음을 추구하는 것이다. 더할 나위 없이 명쾌하고 단순한 건축적인 프로그램이고 가장 확실한 도서관에 대한 정의다.
p202-203
모든 직업이 그렇겠지만 건축에 있어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기술적인 현란함이나 숙련도에서 나오는 미학적인 아름다움 혹은 부가가치 창출이 인다. 무엇보다 직업 윤리가 우선되어야 한다. 건축가로서 가져야 할 직업 윤리란 바로 사용자의 편의와 사용자와의 교감이 아닐까? 무엇보다 건축가의 눈은 사람을 바라봐야만 한다. (...) 집 짓는 일의 안내자로서 건축가가 언제나 지켜야 할 자세라고 생각한다.
p219
사람들은 누구나 어떤 일, 특히 자신이 하는 일을 통해 자기완성을 하고자 노력한다.
p247
"건축구조는 세 가지 본질을 반드시 갖추어야 하는데, 견고함과 유용성, 그리고 아름다움이다." 이것은 기원 전 1세기 로마의 건축가였던 비트루비우스 폴리오가 한 말이다.
p20
동양사상에서는 '반대'라는 개념을 '다른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움직임과 정지가 반드시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음양처럼 조화한다고 보는 그것입니다. 그래서 한국춤에는 정중동 사상이 있는데 이것은 정지 속에 움직임이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 최준식, <위대한 문화유산_살풀이춤> 칼럼 중에서
p25
무한히 긴 집, 종묘는 영혼이 사는 집이고 신이 사는 집이다. 인간의 척도가 아닌 신의 척도로 지어진 그 수평적 무한성과 공간감은 우리의 감각을 넘어선다. 그리고 공간은 크게 움직인다. 그것은 동양사상이 추구하는, 움직이지 않음으로써 가장 크게 움직임을 얻는 정중동의 미학을 구현한 한국 건축 미학의 완결이다.
p29
사회적인 동물인 인간에게 가장 기본적인 덕목이며 도덕률인 서로 배려하고 존경하는 마음과 자세이다. 존경은 어떤 개체가 다른 개체를 인정하고 그 존재의 의미를 존중하며 교류하고자 하는 마음을 담는 것이다. (...) 그런 개념을 바탕으로 한 건축이나 공간 혹은 그런 사회 그런 도시에서, 사람은 진정한 인간으로서의 삶을 이룬다.
p33
경복궁이 직교하는 좌표와 책에 나온 대로 법칙대로 정연하고 엄숙하게 만들어놓은 정궁이라면, 창덕궁은 땅의 흐름과 기운의 흐름대로 공간들 간의 상호 존중과 땅들끼리의 교감을 바탕으로 지어놓은 건물이다.
p37
내가 본 소수서원은 신분의 높고 낮음과 나이의 많고 적음이 엄존하는 교육의 공간에서도 위계를 뚜렷이 드러내기보다는, 서로에 대한 배려와 존경과 애정이 적당한 위치와 드러나지 않는 은근한 위계를 통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아주 인간적이며 따뜻한 공간이었다.
p39
절을 찾아갈 때 산문을 지나 천왕문 앞에 다다르고, 다시 누각을 지나 본전에 다다르는 길은 사람의 세상에서 부처의 세상으로 건너가는 무척 의미 있는 과정이다.
p47
불교에서는 세상에 10개의 계단이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그걸 하나씩 오르게 되는데 부처를 믿는 것, 절로 가는 것이 그런 의지의 현실화이다. 그래서 절은 오른다. 천천히 오르며 마음에 얹혀있던 짐들을 하나씩 내려놓게 된다. 절을 건축한 건축가들은 관념과 현실을 불경과 땅이라는 눈에 보이는 객체에 투영하고, 마치 장엄한 음악처럼 건축이 완성된다.
p66-69
안도 밖도 아닌, 자연과 집 사이에 놓인 마루. 우리는 마루를 무척 좋아한다. 그 촉감을 좋아하고 그 단어가 가지는 넉넉함을 좋아한다. (...) 마루는 '전이적 공간'이며 경계를 넘나드는 '무변적 공간'이다.
p72
마루는 방과 부엌 같은 필수 생활공간이라기 보다는 여유를 표현하는 사치 공간이자 외부공간과의 관계를 활발히 하는 정서공간이다. 도 어떤 용도로든 쓸 만큼 전용성이 큰 공간이며 공식적 활동이 일어나는 공적 공간을 대표한다.
- 전봉희, <한국건축 개념사전> 중에서
p94-95
사실 명당이라고 절대적인 기준이 있는 것은 아니다. (...) 다만 '어떤 사람'에게 맞는 '어떤 땅'이 있을 뿐이다. 즉 자신에게 맞는 땅을 골라서 그 위에 살게 되면 몸과 마음이 편안해지고 그 편안함 속에서 자신의 역량이 배가되는 것이다.
p111
옛 흔적들을 살리되, 새로 끼어드는 요소들은 굳이 옛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기보다는 현대의 장점들을 활용한 재료와 형태가 자연스럽게 공존하도록 했다.
p118
이상하게 지리산은 사람을 감동시킨다. (...) 그 덩치가, 그 느림이 감격스러우며, 그 골격이 감격스럽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싫은 내색, 좋은 내색 전혀 없이 사람을 턱 하고 안아주는 품이 감격스럽다. 그래서 지리산 근처에만 가도 마음이 푸근해지며, 사람으로 태어나 이왕이면 지리산의 품 정도는 되어야 하지 하고 스스로 다짐해보곤 한다.
p133
"마음이 밝은 것을 경이라 하고, 밖으로 과단성이 있는 것을 의라 한다." (...) 삼가하고 삼가하며 진리를 깨닫고자 하던, 내면의 충실하고자 했던 경에 입각한 건축, 조목은 그런 스승의 생각을 옮겨놓기 위해 내면적으로는 엄격하나 겉으로 드러남에 있어선느 실질적이며 겸손한 태도를 건축에 불어넣었다.
p150
내소사 설선당은 지형을 이용해서 네모반듯한 안마당을 중심으로 집의 사면이 서로 맞물리며 반 층씩 올라가는 모양으로 되어있다.
p178
우리가 무엇이건 경험을 할 대 그 인상이 만들어지는 것은 다양한 감각에서 들어오는 정보들의 총체적인 합이다. 그런데 단지 어느 부분만을 보고 어떤 대상을 평가하는 것은.. (...) 총체적이고 다양한 단서들의 조합으로 만들어내는 인상이 아니라 그냥 맥락 없이 순간적으로 들어온 단편적인 정보를 가지고 이야기할 때의 인상은 오해를 낳기 쉽다.
p233
'정와', 즉 고요한 처소라는 의미를 가진 글씨인데, (...) 단아하고 가볍고 모든 번잡과 시끄러움을 잠재울 듯한 글씨였다.
p262
남간정사는 입체가 아니고 벽에 얕게 새겨놓은 부조와 같은 인상을 준다. 자연에 집을 넣되, 절대로 자연을 크게 파내지 않고 얇게 저며 내고 그 위에 가볍게 그러나 절대로 가볍지 않게 앉힌 것이다. 자연에 입혀진 형식이 무척 묘하다.
p268
그렇게 여행은 바람과 같고 그림자와 같다. 자취가 남지 않는다. 그냥 지나가는 것이다. 그 모양이 우리가 사는 인생과 흡사해서 사람들은 여행을 하며 깨달음을 얻는 모양이다.
p286
지리산에 들어가서 나오지 않은 사람들이 많다. 그리고 억울한 일이 많은 사람들이 지리산에 모인다. 역사적으로 그런 일들이 많았고 그때마다 지리산은 그 넓은 품을 열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