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꼬마의 글공간
그래, 어느 순간이라고 해야 하는게 맞을 것 같다.
어느 한순간 나는 이 순간에 도착해 있었다.
딱히 뒤를 기억하려는 것은 아닌데
자잘하게 지나온 날들은 내가 무엇을 하며 지나왔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루 그리고 또 하루 무엇들을 하며 지나왔는지 기억나는 것은
내 감정의 기복이 아주 높거나 낮을 때의 순간들만 기억이 났다.
그 순간 나는 매우 힘들었고 지쳤고 슬펐는데 지금 고개를 돌려보니
너무나도 그것들이 별거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그런 감정들이 아닌데...
그렇게 쉽게 흘려보내야 하는 고통들이 아닌데...
단지 모든게 전부 이렇게 부질없이 부서져 사라지는 건 아닌지 두려워진다.
지금 아픈 것도, 힘든 것도, 슬픈 것도, 두려운 것도 모든 부정적인 마음들도
조금 지난다면 또다시 아주 작게 부서져가며 흩날려 사라지는건 아닌지 걱정이 커진다.
너는 이렇게 성숙해지는 거야
너는 이렇게 강해져가는 거야
너는 그렇게 어른이 되는 거야
따위의
그런 긍정적인 위로들로 나의 마음을 돌리기에는
나는 너무 나약하다...
그렇게 사직서를 냈다.
지구가 멸망하는 일은 아닌데 세상이 너무 무서워진다.
앞으로 잘 해나갈 수 있을지...
앞으로 잘 살아갈 수 있을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것인지...
내 결정에 대한 확신을 했다고 믿었지만 거짓 믿음이였던 것일까.
버티지 못하는 자신의 나약함이 미워졌고
아프게만 하는 사회의 무관심이 미워졌고
독하게 마음먹은 결심과는 다르게
이제부터 통장에 돈이 들어오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숨이 턱턱 막혀온다.
당신을 잃었던 절망처럼
돈이 없어진다는 상황은
모든 세상이 무너져 내려가는 것처럼
나의 목숨이 당장에 사라져 없어질 듯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것인지
이 순간 다시 깨닫게 된다.
일도 잘 하면서 왜 그만두는 건데?
사직서를 받은 상사의 표정에는,
정말로 궁금하다는 저 표정에는,
건네받은 사직서의 의미를 진짜 모를까.
그래, 어느 순간이라고 해야 하는게 맞을 것 같다.
어느 한순간 나는 이 순간에 도착해 있었다.
딱히 누구를 탓하려는 것은 아닌데
자잘하게 지나온 날들은 내가 여기에 있지 못할 이유들을 계속 찾게 만들었다.
이렇기 때문에 나는 이곳과 맞지 않아
저렇기 때문에 나는 저놈과 맞지 않아
이렇게 저렇게 수많은 이유들을 만들어가며 떠나야 되는 핑계들을 찾았고
이렇게 저렇게 수많은 이유들을 참아가며 떠나지 못하는 핑계들을 찾았고
그래, 어느 순간이라고 해야 하는게 맞을 거 같다.
어느 한순간 나는 이 순간에 도착해 있었다.
나의 삶을 위해서 일하는데 나의 삶은 어디에 있을까...
문득, 그렇게 도달한 생각의 끝에서 이런 물음이 떠올랐다.
열심히 공부했고
열심히 일을 했고
열심히 돈을 버는데
분명 누군가들보다 뒤처지지 않고 열심히 나아간다고 생각했는데
문득이라는 순간이 찾아오자 나의 존재가 마치 사라져 없어질 것 같아 마음이 아파왔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선택권은 이제 너무나 좁다.
막연함을 끌어안고 여기까지 왔는데
아직도 그 막연함을 버릴 수가 없다.
마음을 돌려보는건 어때?
회유시키는 상사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나는 이미 결정을 끝냈고 당신의 말을 들을 생각이 없다.
그렇게 이곳의 마지막 퇴근 시간이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