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1975 바이살리아의 좀도둑(Visalia Ransacker)
골든스테이트킬러라고 불리는 조셉 디앤젤로(Joseph Deangelo)는 1973년부터 1986년 사이 미국 캘리포니아 북부와 남부를 돌며 수많은 범죄를 저질렀다. 많은 범죄자가 그렇듯 그도 처음에는 작은 범죄부터 저지르기 시작했다. 그가 가장 먼저 저질렀던 범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집에 들어가 이것저것 뒤지고 이상한 물건들을 훔쳐가는 '좀도둑'질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범죄 수법이 발전하고 대담해지기 시작한다. 좀도둑질 이후에는 여자가 혼자 있는 집에 들어가 강간을 저질렀다. 그리고 나중에는 남편이나 파트너가 있는 집에 들어가 남성을 움직이지 못하게 결박한 후 강간을 질렀다. 더 시간이 흐르고 나서는 결국 연쇄 살인을 저지르게 된다.
내가 그와 관련된 책, 인터넷 자료, 팟캐스트들을 보거나 들으면서 알게 된 점은 그의 초기 범행(좀도둑, 강간)들에 대해서는 비교적 상세히 기술되었으나 그가 저지른 살인에 대해서는 대부분 자세히 언급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아마도 그가 저지른 살인은 글로 언급하기에 너무 잔인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앞 글에서 소개한 'I'll be gone in the dark'라는 책에서 작가는 당시 그 사건을 담당했던 경찰을 인터뷰하며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그는 경찰로 근무를 했을 당시 머리가 없는 시체들을 조사한 적도 있었고, 부패된 젊은 여성 시신에 주술로 보이는 문양이 새겨진 것도 조사를 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의 말대로 '머리털이 곤두서는 느낌을 받은' 살인자는 오직 그(골든스테이트킬러) 뿐이었다고 한다.
이번 글에서는 그의 범행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좀도둑질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1973년부터 1976년 사이 캘리포니아 중부에 위치한 바이살리아(*)라는 시골 동네에 약 150건의 좀도둑 사건이 발생했다(영어로 Ransacker라고 하면 무엇인가를 샅샅이 뒤지는 사람을 뜻한다. 한국말로 적당한 표현을 찾지 못해 여기서는 '좀도둑'이라고 표현하였다). 그런데 이 좀도둑은 범행 숫자도 놀랍도록 많지만 범행 방식도 매우 특이했다. 보통의 좀도둑들과는 달리 물건을 훔치는 것보다 단순히 남에 집에 들어가 물건 뒤지는 것 자체를 즐기는 듯 보였다.
(*)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바이살리아의 1970년대 인구는 3~4만 명 수준이었음
이 특이한 좀도둑은 많게는 하루에 5 ~ 6개의 집에 침입하였다. 그리고 그는 집안 구석구석을 뒤져 온통 어지럽혀 놓았다. 온 집안을 뒤졌지만 정작 값비싼 물건들은 그냥 놔두고 아주 개인적인 물건들을 가져갔다. 예를 들어 결혼반지나 귀고리를 훔쳐갔는데 귀고리는 굳이 한쪽만 훔쳐갔다. 그리고 앨범을 뒤져 사진 몇 장을 훔쳐가는 식이었다. 당시 그의 범행에는 성적인 동기가 있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옷장에서 속옷을 꺼내서 방에서 화장실까지 일렬로 쭉 펼쳐 놓는다거나 주로 여자 사진을 골라서 가져갔기 때문이다.
이 범인은 남의 집에 들어가 좀도둑을 하는 범죄 말고도 몰래 숨어서 남의 집을 엿보는 행위도 많이 하였다. 관련 팟캐스트를 들어보면 70-80년대 미국에는 이러한 사람들이 흔했는지 'Peeping John(엿보는 존)'이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우리나라의 '바바리맨'이 생각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우리도 어렸을 때를 생각해 보면 좀도둑이나 길거리에 변태들이 심심치 않게 있었으니 당시 미국에서도 이러한 사람들이 어느 정도 있지 않았을까 싶다.
하지만 오늘날에 비해서 이런 일이 조금 더 흔하게 발생했다고는 하여도 당사자에게는 정말 엄청난 고통을 주는 행위였을 것이다. 한밤 중에 누가 창문 밖에서 자기를 쳐다본다고 생각을 해보자. 특히 여성들의 경우 그 공포가 평생 잊히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당시 피해자들의 인터뷰를 들어보면 비록 본인의 신체에 직접적인 해를 당한 것은 아니지만 평생 동안 정신적으로 큰 고통받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Man in the window'라는 팟캐스트에 소개된 한 피해자의 이야기는 참으로 섬뜩하다.
어느 날 갑자기 아빠가 숨을 몰아 쉬며 집에 들어왔다. 아빠는 집 밖에서 누가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것을 발견해서 바로 쫓아갔으나 범인을 놓쳤다고 했다.
그 일이 있은 후 6개월 정도 후 집에서 남자 친구와 TV를 보고 있었다. 남자 친구에게 몇 개월 전에 이상한 남자가 밖에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웃으며 '지금도 밖에서 쳐다보고 있는 거 아니야'라고 말했다.
그리고 TV 채널을 바꾸기 위해 일어났는데 창문 밖에서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남자를 발견하였다. 나는 너무 놀라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고 곧바로 남자 친구와 아빠가 달려 나갔지만 또다시 범인을 놓치고 말았다.
이런 일이 있은 이후에도 범인은 또다시 한번 더 이 여자 집에 나타난다. 이번에는 피해자가 잠을 자고 있었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괴한이 나타나 총으로 협박을 하면서 피해자를 밖으로 끌고 나갔다. 피해자가 끌려나가는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깬 피해자의 아빠는 복도에서 범인과 몸싸움을 벌였다. 몸싸움 끝에 도주하는 범인은 뒤를 향해 총을 세발 쏘았고 그 총알에 맞은 피해자의 아빠는 사망을 하고 만다. 이것이 골든스테이트킬러가 저지른 첫 번째 살인이라고 알려져 있다(**).
(**) 2019년 말 처음 글을 쓸 때만 하여도 이 살인은 증거가 불충분하여 기소가 되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재판 과정에서 범인이 자신이 살인한 것임을 인정하여 유죄가 선고되었다.
이 살인 사건이 발생한 것은 1975년 가을의 일로 1973년 범행을 시작한 좀도둑이 강간범으로 진화하는 단계를 보여주고 있다. 이 사건이 발생한 후에도 범인은 이 지역에서 약 30~40여 건의 범행을 추가로 저지른다. 이때 몇 건의 범행은 이전과는 달리 집안에 사람이 있는 상태에서도 침입을 하였다.
물론 경찰이 손을 놓고 있었던 것만은 아니다. 살인 사건이 발생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한 피해자가 자신의 집 창문 주변으로 수상한 발자국이 찍혀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경찰에 신고를 했다. 경찰은 범인이 다시 현장에 돌아올 것임을 직감하였고 잠복근무 끝에 피해자의 집으로 접근하는 수상한 사람을 발견하게 된다. 잠복을 하고 있던 두 명의 경찰이 그를 붙잡으려고 하였으나 범인은 바로 도주를 하였다. 경찰들은 그를 계속 쫓아서 그를 막다른 길에 몰아넣었다.
하지만 대치 상황 중 범인이 갑자기 경찰에게 총을 발사하였고 한 경찰이 그 총알에 맞고 만다. 다른 경찰은 깜짝 놀라 동료의 상태를 확인하였고 그사이 범인은 또다시 도주에 성공하게 된다. 천만다행으로 범인의 총알이 경찰의 가슴에 있던 플래시 라이트에 맞아서 크게 다치지는 않았지만 아쉽게도 이렇게 범인을 놓치고 말았다(***).
(***) 범인은 재판 과정에서 이 살인미수도 자신이 한 것임을 인정하여 유죄를 선고받았다.
이 사건이 발생한 것이 1975년 12월이었고, 골든스테이트킬러가 범행을 저지르는 긴 시간 동안 가장 체포에 가까웠던 순간이다. 이후 다른 지역에서 발생한 범죄들의 경우 경찰들은 전혀 범인의 존재조차 파악할 수 없게 된다.
아무튼 경찰에 거의 붙잡힐 뻔했기 때문일지는 모르겠지만 범인은 이 지역에서 더 이상 활발하게 범행을 저지르지 않게 된다. 글을 쓰기 위해서 참고한 자료에 따르면 1976년에 두 건의 좀도둑질이 더 발생한 것으로 보고 있으나 동일범의 소행인지 아니면 모방범의 소행인지는 범인 본인만 알 것이다.
이 '바이살리아의 좀도둑'이 향후 등장할 'East Area Rapist(EAR, 동부 지역 강간범)'과 동일한 인물이라는 것은 이 범인의 범행 방식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앞서 말했듯 범인이 이미 재판 과정에서 자신이 저지른 범죄임을 인정함).
예를 들어,
비싼 물건을 놔두고 사진, 반지 등 개인적인 물건을 가져간다
발각 시 도주가 용이한 1층 집을 범행 대상으로 삼고 항상 2개 이상의 문이나 창문을 열어서 탈주로를 확보한다
한밤 중에 단독 주택에 침입한다
범행 시 집안에 있는 물건들을 이용하여 자체 알람 시스템을 만든다. 예를 들어 접시 등을 출입구에 놓아서 누가 들어올 경우 소리가 나게 한다
범행을 하기 전 범행 대상을 지켜보고 행동 방식을 파악한다
하지만 때는 70년대 미국. 당시에는 미국이라고 해도 과학수사가 발달하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각 지역 경찰끼리 협조도 전혀 안되었다. 나중에 EAR 사건이 발생했을 때 바실리아의 좀도둑 사건을 담당했던 일부 수사관들은 동일범의 소행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들이 붙잡지 못한 범인이 다른 지역에서 활개를 친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던 윗선에서 다른 지역 경찰과의 수사 협조를 막았다. 더 나중에 남부 캘리포니아에서 살인 사건이 발생했을 때도 이와 유사한 이유로 지역 경찰들끼리 전혀 협조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범인이 잡힌 이후 알게 된 사실이지만 조셉 디앤젤로는 1973년부터 1976년까지 바실리아 근처의 조그마한 동네(Exeter, CA)에서 경찰관으로 일을 했다고 한다(본문 위의 사진이 바로 1970년대 경찰로 일하고 있었을 때의 사진이다).
한편 많은 전문가들이 1972년부터 1973년 사이 새크라멘토 동쪽인 랜초 코르도바(Rancho Cordova)에서 발생한 일명 '코르도바의 좀도둑(Cordova Cat Buglar)' 사건도 동일 인물에 의해서 저질러진 사건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당시 약 50건의 좀도둑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범행 방식이 기본적으로 바이살리아의 좀도둑 사건과 매우 유사했다. 그리고 처음 좀도둑이 발생한 1972년에 조셉 디앤젤로가 범행 장소와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대학교를 다녔다. 그리고 랜초 코르도바에서 갑자기 범행이 멈추고 바이살리아에서 범행이 시작된 1973년, 그는 바실리아 근처에서 경찰로 일하기 시작한다.
끝으로 처음 이 글을 쓰는 기간 중 다음과 같은 기사를 읽게 되었다. 법이 허술하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이 골든스테이트킬러 피해자들을 생각해 본다면 법을 강화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다. 앞서 말했든 저런 일을 당한 피해자는 그 일을 평생 잊지 못하고 고통을 받는다. 그리고 저러다가 점점 진화하여 또 다른 EAR이 나올 수 있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