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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든스테이트킬러 - 3. 본격적인 범행

1976 - 1979 동부지역 강간범(East Area Rapist)

by 김검사 Oct 25. 2020

지난번 글에서 설명한 캘리포니아 바이살리아 지역에서 벌어진 좀도둑질 및 살인 사건은, 범인이 경찰에게 거의 붙잡힐 뻔한 1975년 12월 이후 더 이상 발생하지 않게 되었다(자료에 따라서는 몇 건 더 발생했다고 보기도 한다). 몇 년 동안 무수한 좀도둑질에 시달렸던 그 지역의 경찰 상부는 더 이상 사건이 발생하지 않자 한 시름을 놓게 되었다. 


하지만 범인이 갑작스럽게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저 캘리포니아 중부에 위치한 바이실리아에서 북부의 새크라멘토로 범행 장소를 이동하였을 뿐이었다.


2. 동부지역 간강범(East Area Rapist, EAR) / 범행시기: 1976 - 1979


EAR의 범행 장소. 초기에는 주로 새크라멘토에서, 후기에는 주로 샌프란시스코 베이(Bay) 동부지역에서 범행을 저질렀다EAR의 범행 장소. 초기에는 주로 새크라멘토에서, 후기에는 주로 샌프란시스코 베이(Bay) 동부지역에서 범행을 저질렀다


골든스테이트킬러와 관련된 책을 읽거나 팟캐스트를 듣다 보면 70년대 미국은 거의 '충격과 공포' 수준의 치안을 자랑했던 것 같다. 길거리에는 온갖 강간범들과 연쇄 살인범들이 활개를 쳤고 밤에는 정신 이상자들이 남의 집 주변을 서성거렸다. 뭐 내가 어렸을 때를 생각해 보면 우리나라도 80년대와 90년대 중반까지는 납치 사건도 많고 연쇄 살인 사건도 많기는 했다.


어쨌든 이 골든 스테이트 킬러, 당시에는 동부지역 강간범(East Area Rapist, EAR)으로 불렸던 이 범인도 정말 많은 강간을 저질렀다. 자료에 따라 약간씩 차이는 있지만 약 50번의 강간을 저질렀다. 1976년 6월에 처음 강간 사건이 발생해서 1979년 7월까지 지속되었으니 매달 1~2건 정도의 강간을 저지른 것이다. 실제로 하루에 두 번의 범행을 저지른 날도 있고 한 달에 다섯 번의 범행을 저지른 적도 있다. 


초기에는 주로 새크라멘토 동쪽 지역에서 범행을 저질렀다(위 지도에서 보라색 점들이 위치한 지역). 이때는 여성이 집에 혼자 남아있을 때를 틈 타 범행을 저질렀다. 이 범인은 꽤나 상세하게 피해자를 파악하고 있었는데 남편이 일을 하러 나갈 때를 기다렸다가 침입을 하기도 했고, 범행 중에 피해자에게 남편에 대해 언급하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남편이 일하고 있는 곳을 언급하거나 군인이었던 남편의 계급을 언급하는 식이었다. 


약 1년이 지난 1977년 4월부터는 범죄 수법이 더 대담해지기 시작한다. 이제는 여성 혼자 남아있는 집을 침입한 것이 아니라 한밤 중에 가족이 모두 자고 있는 사이 집에 침입해서 법행을 저질렀다. 피해자들의 인터뷰를 들어보면 범행 방식이 지독하게도 잔인했다. 


피해자들은 침대에서 잠을 자고 있다가 누가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무슨 소리인가 싶어 침대 끝을 보면 얼굴을 가린 남성이 서있었다(실제로 이런 일을 당한다면 평생 공포에 시달릴 것이 분명하다). 피해자들은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어리둥절했지만 범인은 총으로 이들을 협박해서 여자가 남자를 묶도록 시켰다. 다 묶고 나면 범인은 남자 등에 접시 같은 것을 올려놓고 만약 이것을 떨어뜨린다면 여자를 죽일 것이라고 협박을 한 후 여자를 거실이나 다른 방으로 끌고 가 범행을 저질렀다. 범행이 벌어지는 동안 남자는 그 소리를 들으며 몇 시간 동안이나 무기력하게 엎드려 있을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아이들이 자고 있는 집에서도 이와 같은 방식으로 범행을 저지르기도 하였다.


이 범인은 처음 강간을 범한 후 피해자에게 움직이면 죽일 것이라고 협박을 한 후 집 안을 돌아다니면서 음식을 꺼내 먹고 맥주를 마시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다시 피해자에게 돌아가 강간을 저질렀다. 이런 식으로 피해자 집에 머물면서 많게는 다섯 차례 이상 강간을 하였다(정확한 숫자는 다시 책이나 팟캐스트를 찾아보면 알 수 있겠지만 계속 이 사람 이야기를 듣고 있다 보면 삶이 우울해져서 그냥 많이 저질렀다고만 하자). 


더욱 잔인한 것은 범행이 언제 끝날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범행 시 피해자의 눈은 가려져 있기 때문에 피해자는 오직 소리로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몇 차례 강간 끝에 더 이상 범인의 소리가 들리지 않아서 이제 떠났나 싶어서 몸을 움직이면 범인이 갑자기 칼을 들이 대고는


내가 움직이지 말라고 했지! 또 움직이면 죽을 줄 알아!


라고 협박을 했다. 피해자가 얼마나 시간이 지난 후 몸을 움직였는지는 모르지만 범인은 적어도 몇 십분 동안 피해자가 언제 움직이나 지켜보고 있었다는 소리다. 사람이 어떻게 이럴 수 있나 싶을 정도이다. 


한 번 이런 일을 당하면 겁에 질린 피해자는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범인이 지켜보고 있을 수 있다는 공포에 몇 시간 동안이나 움직일 수 없었다. 그리고 알 수 없는 시간이 흘러서야, 때로는 동이 트고 나서야 몸을 움직여서 경찰에 신고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앞서 말했듯 결박당한 남성의 경우 범행이 벌어지는 내내 자신의 부인이나 여자 친구가 고통받는 것을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비록 직접 고통을 받은 여성에 비할바는 아니겠지만 남성 피해자가 받은 고통 또한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이들은 평생 자기 부인, 여자 친구를 지키지 못했다는 생각에 고통받으며 살았지만 어쩌면 남성이라는 이유로 피해자로 인식되지 못했다. 


골든스테이트킬러를 추적한 'I'll be gone in the dark'라는 책과 'Man in the Window'라는 팟캐스트에 피해자의 파트너(남편 또는 남자 친구) 이야기도 소개된다. 한 피해자의 남편이 다른 피해자의 집에 찾아가 그 남편을 만나 자신도 피해자의 남편이라고 소개하는 장면이 있는데 더 이상의 설명이 없어도 그들의 마음을 알 수 있었다.


범행 현장에서 발견된 단서 중 하나. 범인이 떨어뜨리고 간 것으로 추정된다. 앞면에는 어느 지역의 지도가, 뒷면에는 'Punishment(처벌)'라고 적혀있다.범행 현장에서 발견된 단서 중 하나. 범인이 떨어뜨리고 간 것으로 추정된다. 앞면에는 어느 지역의 지도가, 뒷면에는 'Punishment(처벌)'라고 적혀있다.



새크라멘토와 샌프란시스코 동부지역에서 3년 동안 50건에 가까운 연쇄 강간 사건이 발생하였지만 당시 경찰은 사건을 외부에 알리지 않는 것에만 신경을 썼다. 당시 경찰은 모방 범죄에 대한 우려 때문에 수사를 비공개로 진행했다. 하지만 범인의 범행 방식이 대중에게 알려졌다면 많은 피해자를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범인은 바이실리아에서 벌였던 좀도둑 사건과 마찬가지로 몇 가지 특이한 행동 양식을 보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범인은 실제 범행 전 아무도 없는 집에 침입해서 그곳에 사는 사람들과 내부 구조를 파악한다거나 받으면 대답을 하지 않는 전화를 계속 거는 (집안에 언제 사람이 있는지 파악하기 위해) 등의 행동을 했기 때문에 이런 정보가 일반 대중에게 알려졌다면 많은 피해를 줄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각 지역 경찰끼리 전혀 협조가 되지 않은 것도 문제였다. 누가 봐도 동일범의 소행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사건들이 여기저기에서 발생하였지만 각 경찰 조직은 모든 것을 숨기기에만 급급했다. 새크라멘토 지역에서 샌프란시스코 동부 지역으로 범행 장소가 옮겨졌을 때 경찰 상부에서는 '이제는 남의 불행'이라고만 생각을 했다고 한다.


물론 실제로 수사를 담당했던 경찰들은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다. 당시에 수사를 했던 경찰들이 없었다면 후에 범인을 잡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사건을 절대 잊을 수 없었던 몇몇 수사관들이 폐기 대상이었던 이 사건의 수사 기록과 증거들을 30년이 넘는 기간 동안 폐기되지 못하도록 힘썼기 때문에 범인의 DNA이 남아있을 수 있었던 것이다.



범인은 범행을 하기 전에도 여러 차례 전화를 걸어 안에 누가 있는지 확인을 하였지만 범행 후에도 다시 피해자에게 전화를 거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한 예가 지난 프롤로그에서 소개한 14번째 피해자의 통화이다(범인은 2001년 EAR과 ONS가 동일 인물이라는 것이 밝혀진 후 이틀 만에 피해자에게 전화를 걸어 '우리가 했던 거 기억나지?'라고 했다).


이 전화 통화들 중 실제 범인의 목소리가 녹음된 적도 있다. 그것은 바로 1976년 발생한 첫 번째 피해자에게 범행 발생 1년 6개월 정도 이후 걸려온 전화이다. 피해자는 범행 발생 이후 녹음기를 설치했는데 그 전화를 받자마자 이것은 범인이구나 싶어서 바로 녹음을 했다고 한다. 이번에도 수화기 너머로 아무 소리가 없길래 그냥 전화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전화가 끊어질 때까지 한참을 기다렸다가 경찰에 신고를 했다. 그녀는 집으로 찾아온 경찰과 함께 처음으로 테이프를 다 들어 보았는데 범인의 목소리가 녹음이 되어있는 것이었다. 범행 당시 들었던 바로 그 목소리였기 때문에 피해자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래는 'Man in the Window' 팟캐스트에 소개된 통화 내용의 일부이다.




2016년 범인인 조셉 디앤젤로가 붙잡히고 나서 알게 된 사실은, 그는 1973년부터 1976년까지 바이살리아 근처에서 경찰로 일했고, 1976년부터 1979년까지 새크라멘토에서 동쪽으로 30~40분 떨어진 어번(Auburn, CA)이라는 곳에서 경찰로 일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1973~1975년 사이 바이살리아에서 좀도둑 사건이 벌어졌고, 1976년부터는 새크라멘토 지역에서 강간 사건이 발생하기 시작한 시기와 일치한다.


참고로 그가 붙잡히기 전까지 범인의 행동 양식이나 범행 지역을 볼 때 범인이 경찰이나 군인이 아닐까 하는 의견이 많았다. 경찰이라고 의심되었던 이유 중 하나는 바로 경찰 내부에서 어느 지역의 경비가 강화된다고 공유되면 범인은 경찰을 비웃기라도 하듯 그 지역을 피해서 범행을 저지르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끝으로 당시 강간의 공소시효는 겨우 3년이었기 때문에 심지어 초기 범행들의 경우 그가 연쇄 강간을 마치기도 전에 공소시효가 끝나버렸다. 그래서 검찰은 강간 범행 중 피해자를 다른 곳으로 끌고 간 16건의 사건에 대해서만 '납치'로 기소를 하였다(물론 공소시효가 없는 살인 13건에 대해서도 기소됨). 하지만 재판 과정에서 플리 바겐(Plea Bargain, 유죄를 인정하고 형량을 낮추는 것)을 통해서 사형을 면하는 조건으로 50건의 강간을 인정하여 유죄를 선고받았다. 그래도 늦게나마 유죄가 인정되었으니 피해자들에게는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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