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세탁기
오래전 대학교 어학원에서 일본어 수업을 들었을 때 세탁기(洗濯機)라는 단어가 등장했다. 그 단어를 보고 강사님은 세탁기가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발명품 중에 하나인 것 같다고 말을 했다. 나는 속으로 세탁기가 무슨 대단한 발명품인가라고 생각했다. 물론 쓸모 있는 기계이기는 하지만 뭐 하다못해 자동차, 컴퓨터 등등 더 쓸모가 많고 복잡한 기계들도 많은데 겨우 빨래나 하는 세탁기가 대단하다니!
하지만 20년이 지나고 내가 그때 강사님의 나이 정도가 되어보니 왜 그런 소리를 했는지 이제 알 것 같다. 아마 그분도 그 무렵 세탁기가 고장 났던 것이 분명하다.
가전은 LG라는 말이 있지만 본의 아니게 삼성의 가전제품을 구매해야 하는 경우가 있었다. 첫 번째는 결혼했을 때 장만했던 텔레비전이었다. 신혼 가전 대부분은 LG로 구입을 했는데 텔레비전만 삼성 제품으로 구입했다. 와이프 지인을 통해 삼성 임직원 할인을 받을 수 있어서 구매를 한 것이었는데 사자마자 일주일 만에 화면이 나오지 않았다. 곧 결혼식을 올리고 신혼여행을 떠나야 하는데 혹시 신혼여행 갔다가 돌아오면 너무 늦었다고 환불은 안된다고 할까 봐 얼른 전화를 해서 반납을 해버렸다. 그리고 신혼여행을 다녀온 후 LG로 다시 샀다.
그 후로 약 4년 후 그 모든 LG 가전제품을 뒤로하고 캐나다로 떠났다. 캐나다에 와서는 이사를 자주 다니니 냉장고, 전기레인지, 전자레인지, 세탁기, 드라이어 등등 가전제품을 사야 할 일이 몇 번이나 생겼다. 그때마다 신혼 때의 교훈과 나라 사랑하는 마음에 LG 제품만 샀다. 그런데 지금 살고 있는 집에 이사를 와서 보니 전 주인이 놓고 간 후드 일체형 전자레인지(Over-the-range Microwave)가 삼성 제품이었다.
캐나다에서는 집을 사고팔 때 계약서에 놓고 가는 가전제품을 명시하는데 전주인이 전기레인지는 들고 간다길래 그 위의 전자레인지도 세트라서 가져가는 줄 알았다.
전 집주인은 돈이 많은 사람들이었는지 집을 꽤나 고급스럽게 꾸미고 살았다. 전자제품들도 마찬가지여서 놔두고 간 식기세척기는 보쉬였고, 냉장고는 오래되었지만 그래도 켄모어 엘리트(지금은 사라진 Sears에서 파는 상위 가전 브랜드)였다. 그래서 나는 이 전자레인지도 비싼 제품이 분명하다고 혼자 생각했다. 게다가 4년밖에 안된 제품이었기 때문에 전 집주인에게 혼자 감사해했다.
하지만 역시 삼성은 삼성인지 우리가 이사를 온 후 일 년 반도 지나지 않아 고장이 나고 말았다. 겨우 6년밖에 쓰지 않았는데 고장이 나다니! 뭐 어차피 내 돈 주고 산 것은 아니었으니 그냥 삼성이 삼성 했구나 생각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것은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다. 이 후드 일체형 전자레인지를 스스로 설치해 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이게 적어도 두 명은 필요한 작업이다. 그런데 인건비가 비싼 캐나다에서 그것 달자고 사람을 부르면 그렇지 않아도 비싼 기계값에다 설치비로 100~200불은 추가될 테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또 하나의 문제는 고장 난 시점이 하필이면 2020년 4월이라는 점이었다. 코로나로 밖에서 산책하는 것조차 눈치가 보이던 때였으니 집으로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래도 전자레인지는 있어야 하니 새로운 전자레인지(이미 눈치채셨겠지만 물론 LG)를 주문한 후 혼자서 설치하기로 결심했다.
유튜브 영상들을 찾아보니 혼자서 하지 못할 정도의 난이도는 아니었다. 문제는 20kg가 넘는 전자레인지를 혼자서 들어 올리는 동시에 상부의 나사를 조여야 한다는 점이었다. 잘못하다가 떨어뜨리기라도 한다면 전자레인지와 함께 그 아래에 있는 전기레인지까지 박살 날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고 전기레인지를 빼고 설치하자니 전자레인지를 받쳐 놓을 수가 없어서 이렇게 하기도 저렇게 하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고민 끝에 세상에서 가장 튼튼한 박스 중 하나인 우체국 소포 박스를 지하에서 꺼내다가 그 안에 책들을 채워 넣었다. 그리고 그 박스를 전기레인지 위에 놓은 후 다시 그 위에 전자레인지를 올려놓고 나사를 조였다. 말은 간단하지만 설치하는데 두 시간도 넘게 걸렸다.
전자레인지야 내가 산 것이 아니니까 변명의 여지라도 있지만 이사 오면서 구입한 세탁기와 건조기는 내가 무조건 잘못했다. 내가 무엇에 홀렸는지 기어코 삼성 제품을 사고 말았기 때문이다. 물론 나에게도 변명은 있는데 그놈의 애드워시(AddWash) 도어 때문에 사게 되었다.
세탁기와 건조기를 사려고 매장을 둘러보는데 잊은 세탁물이 있을 경우 간편하게 넣을 수 있도록 조그마한 문을 추가한 세탁기가 보였다. 이것은 정말 뛰어난 아이디어라고 생각했지만 안타깝게도 제조사가 하필 삼성이었다. 반도체는 잘 만들어도 가전은 못 만드는 것이 분명한 회사라 구입이 매우 망설여졌지만 세탁기 기능에 꽤나 집착하는 나로서는 이 정도 기능이라면 나의 신념을 바꿀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그렇게 기대했던 애드워시 도어는 알고 보니 세상에서 제일 쓸모없는 맹장과도 같은 존재였다. 나는 당연히 세탁기가 돌아가고 있는 중에도 이 문을 열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 문을 열기 위해서는 세탁기를 정지시켜야 했다. 아니 그럴 거면 그냥 큰 문을 열지 뭐 하러 이 문을 연단 말인가?
그래도 초반에는 빨래를 추가할 일이 있으면 굳이 이 조그마한 구멍으로 빨래를 집어넣기도 하였지만 가끔씩 이 문 사이로 물이 새는 경우가 발생하였다. 누수를 방지하는 고무 패킹이 불량인지 이쪽으로 물이 새는 것이었는데 이 문을 열고 닫은 경우 물이 더 자주 샜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이 문은 건드리지도 않게 되었다. 하지만 문을 열지 않아도 일 년에 세네 번은 여기로 물이 샜는데 그때마다 바닥을 닦으며 과연 이재용씨네 집에는 무슨 세탁기를 쓰고 있을지가 궁금했다. 이딴 제품을 만들다니, 본인이 한 번 써 보라지.
가끔씩 물은 새지만 별일 없이 돌아가던 이 세탁기가 드디어 지난 주말에 본격적인 말썽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세탁 중간에 멈춰서 시간이 넘어가질 않더니 그다음부터는 아무리 전원을 껐다 켜도 물이 들어가지도 않고 드럼도 돌아가지 않았다. 이제 딱 4년 반을 사용했을 뿐인데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싶었다.
보증기간도 끝났고, 수리하는 사람을 부르면 얼마가 나올지 상상도 안되었기 때문에 우선 사람을 부르기 전에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해보았다. 인터넷과 유튜브를 찾아보니 세탁기에 물이 들어가지 않는 경우 주로 밸브(Water Inlet Valve)나 압력 스위치(Water Pressure Switch)가 문제라고 한다. 하지만 우리 세탁기는 작동을 하면 처음에는 물이 조금 들어가는 것으로 보아 밸브는 문제가 없어 보였다.
한편 압력 스위치가 고장 난 경우 물의 양을 측정하지 못해 밸브를 열고 닫거나 드럼을 돌리는 신호를 보내지 못한다고 한다. 그래서 내가 내린 결론은 이 압력 스위치가 고장 나서 처음에만 물이 조금 들어오다 마는 것이고, 물이 들어오지 않으니 드럼을 돌리는 신호를 보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마침 이 부품은 아마존에서 $15에 팔고 있어서 시도해 볼만한 수준의 가격이었기 때문에 바로 구매를 했다.
압력 스위치의 배송을 기다리는 이틀 동안은 이것만 바꾸면 된다는 기대에 그 많은 빨래를 손으로 했다(참고로 우리 가족은 총 5명). 얇고 물이 잘 마르는 옷만 입으라고 했지만 굳이 후드티를 골라 입은 딸 녀석을 원망하면서 열심히 손과 발로 빨래를 했다. 이렇게 손과 발로 빨래를 하려니 일본에서 300엔을 아끼려고 유도복을 손빨래했던 때가 떠올랐다.
당시 얼마나 빨래하기가 힘들었는지 한 번은 운동을 끝내고 놀러 간 친구네 집에서 세탁기를 보자마나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洗濯機使ってもいい(세탁기 써도 돼)?'라고 물어보았다. 아마 그 친구는 별 것을 다 물어본다고 생각했겠지만 그래도 건조기까지 내어주었다. 케이타 군, 이 글을 보고 있다면 다시 한번 고마웠다고 말하고 싶구나.
아무튼 이틀 후 퇴근할 무렵 아마존에서 배송이 완료되었다는 문자가 왔다. 곧 막내를 픽업해야 했지만 우선 집으로 달려가 압력 스위치를 바꾸어 달고 전원을 켜보았다. 그랬더니 절망스럽게도 문제는 그대로였다. 혹시 새로 받은 스위치가 고장 난 것이 아닐까 의심도 해보았지만 그렇다고 다시 부품을 주문할 수는 없었다. 결국 수리점에 전화를 해서 사람을 부를 수밖에 없었다.
캐나다 치고는 놀랍게도 겨우 이틀 만에 고치는 사람이 집으로 왔다. 아저씨에게 증상을 설명해 주고 압력 스위치 이야기도 했다. 아저씨는 이것저것을 둘러보더니 안타깝게도 자기도 문제가 정확히 모르겠다고 했다. 의심되는 부품이 있기는 하지만 자기네는 삼성 공식 수리점이 아니라서 무작정 부품을 사기 어렵다고 했다(결국 내가 돈을 내야 하니까). 자기가 알기로는 그 부품이 단종되었을 것 같긴 하지만 혹시 모르니 삼성 공식 수리점으로 전화를 해보라며 돌아갔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점은 출장비는 받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저씨가 떠나자마자 비록 4.5년밖에 되지 않은 세탁기였지만 당장에 갔다 버리고 새것을 사기로 마음먹었다. 다른 곳에 전화하면 하필 주말이 껴서 적어도 4~5일은 기다려야 할 것이고 게다가 고칠 수 있다는 보장도 없다. 다행히 부품이 있다고 해도 200~300불은 들 테니 그냥 이쯤에서 마음을 접는 것이 내 정신 건강에 도움이 되겠다고 생각했다.
100kg가 넘는 세탁기는 도저히 혼자서 들 수 없으니 동네에서 친하게 지내는 분에게 전화를 해보았다. 다행히 시간이 된다고 해서 꼴 보기도 싫은 세탁기를 차에 싣고는 고철을 버리는 곳에 가서 던져버렸다. 그리로 바로 코스트코로 향했다.
코스트코에는 나를 위해 드럼 세탁기와 통돌이 세탁기가 각각 한 모델씩 준비되어 있었다. 고를 수 있는 선택지가 적다는 것은 단점이었지만 둘 중 하나만 고르면 된다는 것은 장점이었다. 두 개의 가격 차이가 겨우 50불밖에 되지 않았고 집에 있는 드라이어의 색깔을 고려한다면 드럼 세탁기가 나아 보였다. 하지만 문제는 통돌이는 LG, 드럼 세탁기는 삼성이었다는 점이다. 마지막까지 큰 고민에 빠졌지만 하루에 두 번씩 세탁기를 돌리는 우리 집으로서는 물을 적게 쓰는 쪽이 나을 것 같아서 드럼 세탁기로 구입을 하였다.
아... 내가 미쳤지. 그렇게 당해놓고 또 삼성을 사고 말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