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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격 Oct 15. 2022

허무주의가 필요한 시기

2년 전

걱정이 가는 대로 생각하다 보니 우울함이 깊이를 모르고 바닥으로 나아갔다. 

생각을 다른 곳으로 돌릴 필요가 있었다. 

현실 도피가 필요했다. 

쓸데없는 짓으로 단순히 시간만 소비하면 현타가 오고 자책하기 때문에 

뭐라도 도움이 될 만한 것을 해야 했다. 


그때 양자 역학 같은 것도 유행했던 것 같은데, 과학 하는 팝캐스트를 들었다. 

그곳에서는 우주에 대한 얘기를 많이 했다 

듣다 보니 불교의 세계관이 생각났다. 

다중 우주,  억겁의 시간이나 세상의 구성. 

물질 이라는 것이 결국 비어 있는 것...

자세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머리에 쥐 나도록 거대한 규모와 헤아릴 수 없이 긴 시간을 얘기하는 것이 비슷했다. 

외계인이나 미래인간이 과거로 가서 과학지식이 없는 인간에게 우주와 만물의 구성을 설명하려면 불교에서 얘기하는 것 처럼 하겠구나..

신기해하다가 철학하는 팝캐스트로 옮겨 갔다. 


철학을 조금 하다 보면 허무주의로 빠지기 쉽다고 한다. 


뭐 없다. 어차피 티끌이다. 

너무너무너무 미미한 존재들이다.

이런 마당에 의미 있는 게 뭐가 있나.

그저 살면 된다.

어마어마한 세상에서 찰나의 순간을 존재하는 인간 

뭐 이런 의미를 찾는 게 무의미하다. 


근데 뭘 그렇게 가지려 하나.

그래서 이렇게 힘든데.


우울함에 안기는 것도 편안함인가?

계속 파고들어가며 더듬더듬 아래로 침전하던 시기. 

협소한 시선이 아무것도 못 찾고 있던 시기

바닷속 깊은 바닥에 있는 느낌. 

빛도 없고 수압으로 한 점이 돌 듯이 몸이 쪼그라들던 시기. 


나만 초라한 게 아니라 모두가 초라한 거지. 

그런 생각이 위로가 되었다. 

부질없다는 생각으로 하나씩 내려놓으니 몸이 점점 떠올랐다. 

내려놓기 위해서 허무주의가 요긴했다. 


그렇게 떠오르면 다시 출발선에 놓이게 된다. 

남들과 동일선은 아니다 

그들은 모두 이미 달려갔고 나 혼자 출발선이다. 

여기부터는 얼마나 체력이 남았나 가 중요한 것 같다. 


은유가 아니라 실제적인 체력을 얘기하는 것이다.  

재작년 겨울 내내 이어폰 꼽고 철학하며 출퇴근하였다. 

40분 + 40분을 8km를 매일 걸었다. 

차분히 정리되고 그곳에서 떠나 지금 있는 곳으로 이사를 할 수 있었다. 


냉소적 생각을 계속하다 보면 그게 또 지겹다. 

조금씩 생각의 방향이 틀어지고 체력이 남아 있으면 행동으로도 옮겨질 수 있다.

 

그 시기의 모습을 생각하면 월세 50에서 100으로 옮기는 짓을 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우주와 영겁의 시간 같은 걸 생각하다 보니 50만 원 추가로 내야 하는 상황이 받아들여졌다. 

그렇게 한발짝 사람들이 사는 곳과 가까워졌다. 



이후에도 허무주의가 필요했다. 주기적으로.

그치만 침전의 깊이가 다르다. 

적자는 벗어났고 생각도 성장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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