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그녀에게 -베토벤 바가텔 25번 "엘리제를 위하여"
전 국민이 알고 있는 "엘리제를 위하여".
피아노를 잘 치지 못 해도 주테마인 "미레미레미시레도라"는 누구나 한 손으로 칠 수 있을 정도로 친숙한 음악.
학교 벨소리도, 시계 알람도, 현관 벨소리로 사랑 아닌 사랑을 받은 음악.
어째서 우리가 이렇게 "엘리제를 위하여"를 집착적으로 좋아하는지 애석하게도 아직까진 아무도 연구는 안 한것 같다.
베토벤에 대한 사랑인가?
문화민족으로서의 자긍심인가?
단순한 우연인가?
심지어 청소차 후진 음악으로도 나올 정도니...
클래식음악 멜로디가 나오는 청소차가 있는 나라라니 이건 해외 토픽감이다.
내가 관찰한 바로는 누구도 이를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 음악이 어떤 음악인지 몰라서가 아니다. 청소차가 후진하면서 고상한 클래식 음악이 나오는데 이 둘의 상관관계에 대해서 아무도 의문을 가지지 않는다. 너무나 친숙하기에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어째서 모두가 그 음악을 이렇게 친숙하게 알고 있는지 궁금해진다. 우수한 의무교육 탓인지, 누구나 피아노 학원을 다니면 체르니까지는 처야 했던 높은 사교육열 덕분인지 모르겠지만 어쩄든 베토벤의 고향인 독일인들도 잘 모르는 이 노래를 우리가 알 고 있다는건 대단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유감스럽게도 이렇게나 유명한 곡이지만 곡이 헌정된 엘리제가 누구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녀의 정체에 대한 학계의 여러가지 추측에 대한 소개는 넘어가겠다.) "악성"이라 불리는 까다로운 천재 음악가가 음악을 헌정할 정도였다면 미모도 빼어났겠지만, 예쁜 여자야 세상에 널리고 널렸으니, 그녀만이 가지는 독특한 분위기가 있었을 것이다. 어느 정도 중산층 이상의 집안에 베토벤과 음악과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할 수 교양이 적당히 있는 여성이었으리라고 조심스럽게 상상해본다.
나의 이 지극히 아마추어적인 재미에서 나온 상상력은 음악을 들을 때면 이리저리 뻗어나가다가 하나의 그림에 다다른다. 바로 르느와르의 이렌느 깡 단베르의 초상이다. 학창시절 두꺼운 다이어리를 펼치면 제일 먼저 보이는 엽서의 주인공, 교보문고의 명화코너에서 당시 중학생에겐 꽤 비싼 가격의 엽서였지만 보자마자 홀린듯이 그녀를 "get"했다. 짜증나는 학교생활에도 그녀를 보면 왠지 모르게 스트레스가 풀렸다. 이것이 예술의 긍정적 효과다.
그림으로 돌아가서 그녀를 찬찬히 살펴보자. 비록 시대도, 나라도 다르지만 베토벤이 충분히 사랑에 빠질 법한 미모와 분위기를 지녔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것은 이 그림을 그렸을 당시 11살이었다고 하니 그녀는 아직 미성년자다. 서양문화에서 상대의 나이와 상관없이 열렬한 사랑에 빠지는 예는 괴테나 슈만처럼 흔한 경우이기에 별 문제가 안되지만, 베토벤은 아무래도 그간의 기록을 살펴보면 연상이나 또래취향이었던 것 같다. 만약 베토벤이 이렌느 양을 만난다면 무뚝뚝하게 "아직 꼬마 아가씨군. 젖이나 더 먹고 와"라고 했을지도 모른다.
"성숙한" 엘리제 양을 좋아했을 루드비히 반 베토벤씨에게는 미안하지만, 나는 이렌느 깡 단베르 양의 초상화를 보면 늘 "엘리제를 위하여"가 생각난다. 특히 반복되는 도입부의 멜로디를 계속 듣고 있으면 이렌느 양의 풍성한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것 같다. 심지어 건반을 치는 손길이 그대로 이어져 그녀의 아름다운 콧선을 손 끝으로 따라가는 듯한 착각마저 든다. 알지 못 하는 백년 전의 소녀를 이렇게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마법이라니...! 정말 멋진 일이다. 이런 멋진 경험을 선사해 주는 두 위대한 예술가에게 Danke 그리고 merc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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