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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ecilia Choi Aug 21. 2023

교도소 안마당 풍경

인생은 "고 (苦)" - 무소르그스키 "전람회의 그림" 중 "우마차"

무소르그스키는 음표로 그림을 그려내는 작곡가이다. 그것도 형이상학적인 추상화가 아니라 아주 구체적인 사물들을 정말 사실적으로 그려낸다. 무슨 뜻인지 이해가 안 간다면, 그가 작곡한 "왕벌의 비행"을 들어보길 추천한다. 왕벌이 윙윙 열심히 날갯짓을 하며 이리저리 몰려다는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한 재미있는 음악이다. 빠르게 움직이는 음표를 연주하는 연주자의 기교도 그렇지만 어떻게 소리로 이렇게 정확히 사물의 움직이는 모습을 묘사했는지 작곡가의 솜씨에 감탄이 나올 뿐이다. 세상엔 참 천재가 많다. 


그의 작품 중 하나인 "전람회의 그림"은 우리나라에서 자주 연주되는 단골레퍼토리다. 베토벤의 "엘리제를 위하여"정도는 아니더라도, 예술의 전당을 꽤나 다녔다는 사람이라면 "아 그 음악"이라고 바로 알 수 있을 정도다. 전체적으로 웅장하면서도 러시아 예술가들 특유의 "겨울스러움"이 잘 드러나는데, 음악의 전개를 따라가면 마치 동화를 읽는 느낌이 든다.  그중 내가 듣기에 가장 슬픈(?) 음악이 있다. 연주를 하면서 나의 처지와 가장 공감되었던 음악이랄까... 바로 "우마차"라는 곡이다. 무거운 짐을 싣고 가는 우마차를 묘사한 곡인데, 러시아의 추운 날씨에 눈에 젖은 진흙바닥을 헤치며 덜컹이는 나무수레에 실린 무거운 짐을 옮기는 불쌍한 소들의 모습이 연상된다. 대학교 시절 우울했던 겨울날씨에 연습에 치이던 나는 "특별히" 감정을 이입하여 이곡을 연주했었다. 갓 스물이 된 어린 학생이 백 년 전에 살았던 얼굴도 모르는 머나먼 타국의 작곡가와 교감할 수 있다니, 정말 음악은 대단하다.


무소르그스키의 음악에서 느낀 인생의 쓰디씀을 그림으로 옮긴다면 반고흐의 그림들이 0순위 아닐까? 


배고프면 예술이 나온다는 속설처럼 예술가들 대부분이 힘든 삶을 살았다. 특히 "고흐"는 스스로 귀를 자른 유명한 일화에서 알 수 있을 만큼 광증에도 시달렸다. 세상이 그를 힘들게 했는지, 그 스스로가 세상을 못 견뎠는지는 더 생각해 볼 문제이지만 아무튼 그의 작품이 누리는 찬란한 영광만큼 그의 삶은 힘들었다. 


그의 작품 중 "교도소 안마당의 풍경"을 보면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아름다운 프로방스의 풍경화도 아니고, 하필 음울한 "교도소"의 안마당을 그리다니... 직업화가로서 전혀 아름답지도 않은, 팔리지 않는 소재가 분명한 "교도소 안마당"을 왜 그렸을까?  고객 중 누가 자기 집 살롱에 "교도소 안마당" 그림을 걸고 싶을까? 무엇이 고흐에게 이 그림을 그리게 했을까? 단순한 예술가의 심술인가?


고흐의 다른 작품에 비해 화려하지도 않고, 누구나 외면하는 장소를 그린 이 작품을 보면 혐오스러움보다는 동질감이 느껴진다. 높게 쳐진 돌담에 갇혀 간수들의 감시를 받으며 좁은 안마당을 줄지어 빙빙 돌고 있는 죄수들의 모습을 보면 나 스스로가 왠지 죄수 중 하나라도 된 듯한 기묘한 느낌이 든다. 선택을 한다면 누구나 그림의 간수와 같은 포지션을 원할텐데, 왜 하필이면 죄수들의 처지에 감정이 이입되는 것일까? 이 동질감은 화가의 시선일까?


현실에서 뉴스에 나오는 흉악범들을 보면 자연스레 비난과 혐오의 감정이 일어난다. "저들은 나(또는 우리)와 다른 사람이다" 또는 "우리 사회에 있어서는 안 되는 존재들"이라는 기본전제가 그 아래가 깔려있다. 하지만 고흐의 그림에 나오는 죄수들을 보면 측은지심을 넘어 동질감마저 든다. 죄수들마다 그럴만한 사연이 있을 것 같고, 죄 없이 억울한 사람도 있을 것 같으며, 심지어 사회 정의를 실현하는 간수들은 얄미워 보이기까지 한다. 


이런 동질감의 원인은 줄지어 끝없이 원을 도는 죄수들의 모습은 우리의 인생과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원치 않게 삶의 한가운데에서 뚝 떨어져 힘들어도 걸음을 멈출 수 없는 소처럼 우리 역시 끝이 안 보이는 인생의 원을 빙빙 그리며 견디고 있다. 아무리 힘이 들어도 멈출 수 없다. 넘어져도 벌떡 일어나 너덜너덜해져도 좋으니 계속 움직여야 한다.  죄 많은 인생이라도 부끄러움과 비난을 견디며 신이 그 끝을 허락할 때까지 계속 발걸음을 옮겨야 한다. 구원을 기다리며 우리는 매일을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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