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이미 보고 있다

형광펜 하나에서 발견한 의도된 디자인

by JUNE HOLIDAY

아직 초보적인 수준이지만 디자인에 관련된 책을 몇 권 읽다 보니 느낀 점이 하나 있다. 훌륭한 디자이너들은 가히 천재적이다. 더 나아가 기획자들도 그렇다. 그들은 말 그대로 영악할 정도로 훌륭하고 천재적이다. 우리는 나쁜 디자인을 보면 ‘이 디자인은 불편하네’라고 단번에 깨닫지만, 좋은 디자인은 의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당신이 매일 같이 쓰는 어떤 물건의 디자인에 대해서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다면, 그 디자인은 좋은 디자인일 확률이 높다. 그리고 훌륭한 디자이너는 좋은 디자인에 자신의 의도를 자연스럽게 녹여낸다.


디자이너의 의도가 잘 녹아든 물건은 주변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아래의 형광펜도 그런 물건 중에 하나다. 형광펜을 쓰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활자 전체를 칠하는 방법과 밑줄을 긋는 방법. 그중에서도 전자가 더 보편적이다. 활자가 다 덮이도록 형광펜을 쓰기 위해서는 비스듬하게 생긴 펜촉과 종이의 접촉면을 가장 넓게 만들어야 한다. 형광펜으로 마음에 드는 구절을 색칠한 뒤 나는 생각한다.


‘이 형광펜 괜찮은데?’


그리고 나는 이윽고 형광펜 기둥 부분의 하얀 바탕에 눈에 띄게 쓰여 있는 문구 브랜드 이름을 발견한다. 형광펜으로 줄을 긋기 위해 가장 이상적인 각도로 펜을 잡으면 브랜드 이름이 가장 잘 보이도록 디자인된 것이다.(오른손잡이를 기준으로 했을 때 한정이긴 하지만 말이다) 물론 디자이너의 이러한 의도가 사용자에게 인식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달성되어야 한다. 첫째로 사용자가 활자 전체를 색칠하는 것을 선호해야 하며, 둘째로 사용자가 짧은 시간이라도 펜을 살펴봐야 한다.


사실 이 디자인이 정말 의도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만약 의도된 것이었다고 했을 때, 이 형광펜 디자인은 ‘잘 된’ 디자인이라고 말하고 싶다. ‘밑줄을 친다’는 사용자의 과제를 달성하는데 아무런 불편함이 없으며 그 과제를 달성하는 과정에서 ‘해당 브랜드 로고를 각인시킨다’는 생산자의 의도 역시 자연스럽게 실현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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