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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홀짝 Oct 17. 2020

Day 6-2. 여행 한가운데에서도 낮잠은 필요해

서른여덟, 아빠와 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와로롯 마켓


방에 들어가 짐을 싸고 로비로 내려왔다. 이번에도 객실을 나서기 전에 방을 정돈해 놓고 문 앞에 서서 2박 3일 간 머물렀던 방안을 카메라에 담아두었다. 세 번의 체크아웃을 하는 동안 매번 그리 하였더니 이제는 마치 일종의 작별 의식처럼 느껴졌다.



오전 열 시에 체크아웃을 해봤자 다음 숙소 체크인 가능 시각이 오후 두 시 이후라서 시간이 붕 뜨게 될 것이지만 오늘 둘러볼 와로롯 마켓이 올드시티 근처에 있기 때문에 택시로 이동한 후에 프런트에 짐을 맡기고 나와 걸어 돌아다니는 편이 나았다. 웰스 부티크 호텔에서 와로롯 마켓은 20분이면 걸어갈 수 있는 거리다. 


올드시티에서 동쪽으로 약 1km가량 떨어진 곳에 있는 와로롯 마켓은 치앙마이 지역에서 가장 큰 시장으로 알려져 있다. 보통 와로롯 마켓(태국어로는 '깟 루앙')이라 하면 내, 외부에 크고 작은 점포가 잔뜩 들어찬 커다란 건물 한 동을 일컫지만 바로 앞에는 식재료와 꽃을 파는 시장도 있고 주변의 낡고 낮은 건물들 1층에는 대부분 다양한 형태의 도소매점이 영업 중이어서 이 일대가 하나의 커다란 시장 같은 분위기다. 취급하는 품목 또한 다양해서 청과, 정육, 가공식품부터 의류, 신발, 귀금속, 잡화, 주방기구, 가전, 가구, 생활 소품까지 우리가 시장하면 떠올릴 수 있는 것들은 다 있다고 보면 된다. 


나라 밖을 여행할 때 얻는 여러 가지 재미 중에서도 특히나 현지인들이 많이 찾는 시장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멋진 풍경이나 유적도 좋지만 사람 사는 공간에 섞여 드는 즐거움이랄까. 아빠는 나이가 들면서 '새로운 것'이 싫어졌다고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새로운 '음식'에 한정된 이야기다. 여전히 호기심이 많은 아빠도 골목과 복도를 누비며 시장 구경에 적극적이었다. 어제저녁과는 다르게 아빠와 함께 걷는 일이 다시 즐거워졌다.


와로롯 마켓을 찾는 목적이 단지 구경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치앙마이의 야시장들은 대부분 여행객을 대상으로 한 것이기 때문에 그에 맞는 상품을 모아서 볼 수 있다는 장점은 있지만 만약 그런 것들을 가장 싸게 사고 싶다면 와로롯 마켓에 와야 한다. 


그렇다고 야시장에서 와로롯 마켓보다 비싸게 물건을 사는 것이 꼭 나쁘지는 않다. 한 번 보고 마음에 들었으면 그 자리에서 바로 사는 걸 추천하는 이유는 와로롯 마켓에서 그 물건들 하나하나를 찾아 헤매는 것이 매우 비효율적일 수 있어서다. 야시장이나 상점을 구경하면서 내가 아빠에게 늘 했던 말은 '이 물건을 한국 돌아가기 전에 다시 만나리라는 보장은 없어'였다. 다만 태국 과자나 젤리, 라면 같은 가공식품류를 푸짐하게 사고 싶다면 와로롯 마켓을 이용하는 것이 확실히 좋다.



과일을 좋아하는 아빠는 망고 2.4킬로그램과 과일 깎는 칼을 샀다. 하루 중 잠시 호텔방에 들어와 쉴 때마다 스도쿠 책을 펴거나 휴대폰으로 장기를 두었던 아빠가 와로롯 마켓 이후 같은 시간에 하는 일을 하나 더 추가했다. 아빠는 한국으로 돌아가는 날까지 3일 동안 한 번에 하나 씩 망고 2.4킬로를 살뜰하게 다 해치웠다. 
 

누나와 내가 시집, 장가를 가기 전, 네 식구가 함께 살던 시절에 '애들은 별로 먹지도 못했는데 혼자 포도 한 박스를 다 먹는다'며 엄마에게 타박을 받던 아빠가 떠올랐다. 그럴 때마다 '애들이 안 먹는 걸 어떡하냐'며 억울해했던 아빠. 아빠는 처음 한두 번은 까 놓은 망고를 나에게 권하다가 내가 사양하자 그다음부터는 묵묵하게(?) 남은 망고를 혼자 다 드셨다. 나는 그런 아빠가 전혀 서운하지 않다.


아빠와 엄마는 자식을 사랑하는 방식이 다르다. 지금도 엄마는 내가 괜찮다고 손사래를 쳐도 끝내 아들 입에 몇 개를 넣어주고 나서야 당신 몫을 챙긴다. 그래서 엄마는 팥빵을 좋아하지만 집에 챙겨 왔고, 아빠는 라면이 먹기 싫어져서 집에 챙겨 왔다.


아빠는 며칠 째 계속 엄마에게 줄 선물을 사야 한다고 말은 하면서 정작 뭔가를 권하면 별 반응이 없다. 와로롯 마켓에서 숙소 방향으로 돌아오는 길에 라탄 가방과 가구를 파는 큰 상점에 들렀을 때도 아빠는 조금 구경하는 듯하더니 이내 관심을 꺼버렸다. 등나무, 대나무와 생김이 비슷한 식물인 라탄의 줄기를 엮어 만든 크고 작은 가방들이 태국을 찾는 우리나라 여성들에게 인기가 좋아서 많이들 사간다고 귀띔을 해줘도 무반응이다. 대체 무슨 대단한 선물을 사 가시려는지...

 



코코넛 쉘(coconut shell)


점심을 먹으러 갈 식당이 짐을 맡기고 나온 호텔 근처에 있어서 와로롯 마켓에 왔던 길을 거의 그대로 되돌아 걸었다. 올드시티 도로변에 있는 허름하고 작은 식당 '코코넛 쉘'은 다양한 태국 음식을 파는 곳이다. 외국인 관광객들의 입맛에 맞추어 그런 것인지 아니면 원래 음식 맛이 그래서 외국인 관광객들이 많이 찾게 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곳 음식은 태국 음식 특유의 맛과 향이 강하지 않아서 태국 음식을 낯설어하는 사람이 먹기에도 무난하다.


식당 이름처럼 모든 국물 요리가 코코넛 껍데기(coconut shell)로 만든 그릇에 담겨 나오는 것도 특색이라면 특색이고, 과일로 만든 쉐이크 메뉴는 뇌혈관이 찌릿할 정도로 시원하고 맛이 좋아서 손님들에게 인기가 좋다. 올드시티의 대표적인 '가성비' 식당으로도 알려져 있는 코코넛 쉘의 거의 모든 음식 메뉴는 가격이 50바트(약 2,000원)를 넘지 않는데, 치앙다오 식당의 35바트에 비하면 비싸지만 치앙마이에서 이 정도 가격은 매우 저렴한 수준이다. 음식 맛 좋고 특색 있는 식당이 가격까지 저렴하니 당연히 찾는 손님이 많다.


생각보다 태국 음식을 좋아하지 않고 입맛이 까다로운 것이 확실해진 아빠를 위해 이번에도 신중하게 메뉴를 골랐다. 코코넛 밀크를 끼얹은 찰밥에 망고를 곁들인 '망고 스티키 라이스'는 망고를 없어서 못 먹는 데다 태국 찰밥을 님만해민에서 맛있게 먹었던 아빠가 싫어하기 힘든 음식이다. 여기에 닭고기와 채소를 매콤한 소스에 볶은 중화풍 요리까지(솔직히 영문 설명을 보고 아빠가 좋아할 것 같아 주문한 메뉴라 정확한 이름은 모른다). 다행히 아빠의 만족도는 여태까지 먹은 태국 음식 가운데 거의 최상이었다. 엿새째 아빠와 돌아다니며 여러 음식을 먹으면서 아빠가 좋아할 만한 메뉴를 추천하는 내공이 쌓였나 보다.



밥을 먹고 나와서 호텔로 돌아가기 전에 근처 마사지샵에 들렀다. 시장을 구경하고 오가면서 은근히 많이 걷기도 했거니와 가급적이면 '1일 1마사지' 기조를 지키고 싶기도 했고, 무엇보다 호텔 체크인이 가능한 두 시까지 시간이 조금 비어 있었다.

 


웰스 부티크 호텔(Wealth Boutique Hotel)


규모가 작은 대신 멋과 개성이 있는 상품을 취급하는 상점을 '부티크'라고 한다는데, 덩치 큰 건물이 거의 없는 올드시티에는 큰 규모의 호텔이 거의 없다시피 한 대신 멋들어진 부티크 스타일의 호텔이 많다. 이런 부티크 호텔은 대부분 크기가 작아 편의 및 부대시설이 별로 없고 객실 수도 적은 편이다. 한 번에 수용할 수 있는 투숙객의 수가 많지 않고 공간이 넓지 않으니 조식 메뉴도 가짓수로는 단출한데, 그럼에도 숙박비는 그렇게 저렴하지 않다.


그렇지만 부티크 호텔은 객실을 포함한 호텔 인테리어에 멋과 개성이 있고 전체적인 시설 관리가 잘 되어 있다는 장점이 있다. 조식도 가짓수가 많지는 않아도 호텔 나름의 스타일이 있거나 맛과 플레이팅에 공을 들인다. 물론 모든 부티크 호텔이 그렇다는 건 아니고, 호텔마다 차이가 있기는 하다. 전반적으로 규모는 작지만 여러 요소에 신경을 쓴 흔적이 많다는 것이 부티크 호텔 특징이라서 사람마다 선호하는 호텔 취향에 따라 호불호가 갈린다. ('호텔이 멋은 무슨, 깔끔하고 편의 시설 많고 수영장 넓고 조식 뷔페 음식 가짓수 많고 적당히 가성비 좋은 게 최고지'하는 사람에게는 상극일 수 있다) 


치앙마이 여행의 마지막 3박을 보낼 '웰스 부티크 호텔'  역시 전형적인 부티크 호텔이었다. 올드시티 특유의 오래된 좁은 길가 어디쯤에 세워진 아담한 3층 건물의 1층에는 넓지는 않지만 세련된 느낌의 카페 겸 식당이 있다. 건물 뒤쪽으로는 수영장(마찬가지로 작지만 예쁜)이 있는데, 아빠가 별로 내켜하지 않아서 한 번도 이용하지 않았다. 성인 남자 둘이 머물 숙소로 부티크 호텔이 어울릴까 싶기도 했지만 할 수 있는 한 여러 스타일의 호텔을 아빠와 함께 두루 경험하고 싶었다. 치앙다오의 리조트를 제외하고 우리가 묵었던 세 곳의 호텔 가운데 웰스 부티크 호텔은 크기가 가장 작으면서도 숙박비는 1박에 8만 3천 원대로 가장 비쌌다. 큰 차이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방은 가장 넓었다. 무엇보다 좋았던 것은 올드시티의 길과 건물,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분위기에 그대로 녹아들어 함께 숨 쉬고 있다는 점이었다.



낮잠


1층에 위치한 객실로 안내를 받고 들어가 짐을 풀었다. 길 건너편 세탁소에 빨랫감(kg 당 40바트)을 맡기고 돌아와 시장에서 사 온 물건들을 정리하고 나니 오후 세 시쯤, 햇볕이 가장 뜨거울 시간이다. 시장 가면서 걷고, 시장 구경하면서 걷고, 시장에서 돌아오는 길을 걸어온 데다 저녁에도 비슷하게 걸어 돌아다닐 것을 생각하면 지금 할 수 있는 가장 적당한 일은 그냥 널브러져 쉬는 것. 낮잠을 잤다. 


여행지에서 보내는 시간이 아무리 아까워도 쉴 때는 잘 쉬어줘야 한다. 나름 신경 쓰며 다녔으면서도 어제저녁 선데이 마켓에서 확인하지 않았던가. 컨디션 관리에 실패하면 다른 일정도 망치기 쉽다. 특히나 60대 중반 이상의 부모님과 함께하는 여행이라면 무리하게 서너 곳을 다니는 것보다 느긋하게 한두 곳에서 오래 머물고 쉬는 것이 훨씬 나을 수 있다. 길지 않은 여행 중에도 이렇게 경험하고, 배우고, 수정한다. 여행지에서 장소는 어디까지나 배경일뿐, 주인공은 여행 당사자들이다. 배경을 쫓다가 주인공이 나가떨어질 필요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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