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만에 대학 친구들을 만났을 때였다. 평소에 꾸준히 연락을 하고 지낸 친구들이 아니라 온라인 공간에서 간간이 소식을 듣는 기독교 동아리 친구들이었다.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며 수다를 풀어놓는데 여전히 여대생 때의 모습과 말투와 20년의 세월의 흔적들이 뒤섞여있었다. 서로 어떻게 살고 있는지 속 깊은 이야기가 오가며 나는 충격 아닌 충격에 빠졌다. 비슷한 생각과 가치관을 가지고 대학시절을 보냈지만 20년의 다른 세월을 살다 보니 나로서는 공감이 되지 않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신앙이라는 것이 그들의 자유를 제한하고 삶을 더 힘겹게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잠시 혼란스러웠다. 나의 가치관과 전혀 다른 가치관 속에서 사는 친구들. 집에 와서 생각해보니 나는 변했고 그들이 변함없이 순수함을 지켜온 것인지 완전히 다른 시각으로 삶을 바라보고 살아가고 있었다. 인생에 정답이 어디 있으랴. 나 또한 수많은 질문을 하며 지금의 나로 살아가고 있고, 친구들 또한 나와 비슷한 질문들을 하며 살아왔겠지만 답은 모두 달랐다. 그렇게 오랜 세월을 살다 보니 이제는 질문조차 달라져 있었다. 그 친구들의 인생도 나의 인생도.
아파트 놀이터에서 만난 첫째 또래 엄마들과 친하게 지내며 서로의 집을 오가고 근처 맛집을 찾아다니고 여행도 가며 아이들보다 엄마들이 막역한 친구가 되었다. 같은 어린이 집을 보내며 먹을거리, 교육에 대한 생각을 나누며 우리는 코드가 정말 맞다고 자부했다. 그런데 아이들을 유치원에 보낼 때가 되면서 엄마들은 홍해가 갈라지듯 갈라졌다. 평소 숲유치원에 관심이 많았고 조기교육이나 선행학습보다 자연에서 아이들을 키우는 것이 로망이었던 나는 유치원 바로 앞에 숲이 있어 언제나 숲 놀이를 갈 수 있는 유치원을 선택했고, 나를 제외한 엄마들은 깨끗하고 마치 미술관과 같은 시설에 레지오 프로그램을 자랑하는 유치원을 선택했다. 그동안 친밀하게 지냈기 때문에 유치원도 함께 보내고 싶었고 숲유치원에 대한 확신이 강했던 나는 엄마들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엄마들의 마음은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숲유치원은 지저분하고 체계가 없어 보인다는 것이 이유였다. 보육에 초점을 맞춘 어린이집과 달리 교육을 생각해야 하는 유치원에서는 엄마들마다 생각의 차이는 좁혀지지 않았다. 그 차이는 어디서 시작됐을까. 어떤 아이로 어떻게 키우고 싶은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다르지 않았을까.
첫째가 어렸을 때 아토피 증세가 있었다. 모유수유를 하는데 내가 조금만 자극적인 음식만 먹어도 몇 시간 이내 아이 몸이 울그락불그락 해졌고 등에 오돌토돌한 좁쌀 같은 게 생겨나더니 없어지지 않았다, 아이가 6개월쯤에 병원에서 아토피 진단을 받고 돌아오는 길에는 아이를 부둥켜안고 강변에 멍하니 앉아 있을 정도로 절망 모드로 접어들었다. 그때부터 어떤 음식을 먹어야 하고 어떤 환경에서 키울지 본격적인 고민을 했다. 고민하고, 공부하고, 스스로에게 질문한 결과 나에게는 ‘자연’이라는 공간이 그 어떤 것보다 가치가 있다고 확신했다. 어떤 아이로, 어떻게 키울 것인가라는 나의 정답은 자연이었지만 다른 엄마들의 답은 나와 같지 않았던 것이다.
세상에 모든 질문에 답이 하나인 것도 없고 모든 답은 정답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좋은 질문을 찾아야 한다. 좋은 질문이야말로 삶의 질을 바꾸어 놓을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