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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미 Feb 15. 2020

D-250 | 일의 의미는 퇴색하고 눈빛은 남루해졌다

2부 | 丙申年을 보내고 始發點을 맞다 - 퇴사하기 좋은 날

-D-250 | 일의 의미는 퇴색하고 눈빛은 남루해졌다

[그림10] 계절이 바뀌고 사람이 바뀌듯 회사도 변한다

기본적으로 기업은 영리를 추구하는 존재지만 우리 회사는 사회적 의미 창출을 앞세우며 한 때 촉망받던 사회적 기업이었다. 직급을 떠나 프로젝트 단위로 새로운 전문가들과 함께 협업하며 톡톡 튀는 콘텐츠와 행사를 만들어가는 그런. 타향에서 월세살이로 사회생활을 시작해야 하는 나는 누구보다 얼른 돈을 벌어야 했지만, '딴짓'으로 사회적 의미를 창출해나가는 이 젊은 기업이 마음에 들었다. 돌이켜보면 이곳에서 만난 유쾌한 동료들과 함께 한 재미난 프로젝트들이 많았다. 자발적으로 열정을 쏟을 만큼 즐거운 일도 많았고 그 과정에서 내 재능과 의견이 반영되어 좋은 성과를 냈던 프로젝트도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에게 회사 명함을 건네며 자유로운 조직 문화와 일의 재미에 대해 자랑한 적도 있었다.


문제점에 대해서도, 발전안에 대해서도 아무런 자발적 제언이 일어나지 않는 조직은 미래가 없다. 구성원들은 생각이 있지만 자기 의견을 조직에 제시할 필요를 못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의견이 합리적으로 수용될 것이라는 기대감이 없기 때문이다. - <퇴사일지> 중에서 -


하지만 지금은 회사에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는 사람이 없다. 회사 프로젝트에 자기 일처럼 열정을 쏟아붓던 프로젝트 매니저들은 각자의 '개인 사정'으로 하나 둘 떠나갔고 남은 몇몇 조차 이제는 한 사무실에 있으면서도 각자가 섬처럼 동떨어져 모니터 앞에서 또 하루를 살아간다. 점점 더 멀어져 간다.


대학시절 광고동아리 생활을 하면서 목격했던 광고대행사 선배들은 자본주의의 최첨단에서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멋져 보이는 겉모습 속엔 광고'주님'을 대하며 겪어야 했던 숱한 애환들이 있었다. 광고주의 입김에 시달려야 하는 대행사보다 멋져 보였던 '딴짓'으로 세상을 바꾸어 나간다는 이 회사에 입사했지만 어느 순간 '대행용역계약서'를 검토하고 있는 내가 보였다. 회사는 여전히 용역처럼 일하지 않는 젊은 크리에이터의 프로페셔널을 원했지만, 실상은 계약서 상 '갑'으로 대변되는 '주님'의 넘쳐나는 계약 외 과업지시를 최대한 보기 좋게 거절하는 방법을 연구하는 프로페셔널만 쌓일 수밖에 없는 이상과 현실의 괴리 그 자체. 사람들은 변하나 봐 노랫말처럼, 법적으로 인간 취급받는 법인도 결국 변한다. 변해야 살아남는 이 세상이지만 딴짓해야 숨통이 트이는 나의 천성과는 점점 더 멀어져 간다.


그렇게 일의 의미는 퇴색하고 눈빛은 남루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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