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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작은 역할일지라도.

by 쓰는 사람 효주

누군가의 삶의 초라하기 그지없는 단역으로 등장하는 나를 상상해 봤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시간과 장소를 사회와 국가와 우주까지 연결시켜 보면 나라는 존재가 무한대로 커지는 느낌이지만, 나의 바깥쪽 보이지 않는 타인의 시간과 장소 속에 머무는 나는 얼마나 작고 희미한 존재인가. 같은 아파트의 이름 모를 이웃, 편의점에서 곰젤리를 사가는 아줌마, 마트에서 말없이 우유를 진열하는 키 작고 모자까지 쓴 여자, 저녁 6시면 아파트 헬스장에 나타나는 사람으로 잠시 등장했다 사라지는 존재가 바로 나다. 세상의 중심이 '나'란 생각으로만 살다가 문득 '나'란 존재가 먼지처럼 작아지는 순간이 있음 알아차릴 때면 시간의 작은 균열이 생긴다. 직선으로 흐르던 시간이 나선형으로 휘어지고 쪼개져 다시 작은 원이 되는 기분.


언젠가 어린이 인생에서 나는 퇴장한 배우가 될 것이다. 언제 등장해서 무슨 역할을 했는지 기억하기 어려운 작은 역할을 받은 건지도 모른다. 그래도 나는 최선을 다해 '독서교실 선생님'역할을 할 생각이다. 그 야심으로 오늘도 수업을 준비한다. 나는 눈을 감고 숨을 크게 들이쉰다. <어떤 어른, 김소영>


매일 아침 9시면 지방 소도시의 농협마트에서 우유를 진열하는 사람으로 누군가의 삶에 등장하는 나를 상상해 본다. 진열한 우유를 사가는 어떤 손님에겐 다시 출현할 일 없는 퇴장 배우가 될지도 모르고, 정기적으로 오는 손님에겐 가끔 출현하는 엑스트라가 될지도 모르겠다. 그 밖에 마트 안에서 일하는 모든 직원분들에게 나는 OO우유 사장의 사모로 출현할 테고, 마트를 떠난 몇몇의 직원분들에겐 이미 퇴장한 배우가 되기도 했다. 작은 역할을 맡아도 열정을 다해 맡은 인물을 연기해 내는 배우가 시간이 지난 후 더 크고 비중 있는 역할을 해내는 걸 볼 때가 있다. 때로는 아무리 작은 역할이라도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연기를 해내는 사람을 만나기도 한다. 우유진열이라는 시시껄렁한 역할을 맡았지만, 그 시간만큼은 언제나 최선을 다해볼 테다. 유통기한이 임박한 제품은 수거하고, 열 맞추고 질서 정연하게 제품들을 진열할 테다.


누군가의 삶에 아주 작은 역할을 받았을지라도 최선을 다하고 싶다는 작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기억하기 어려운 작은 역할을 잘 해닐때 나를 비중 있는 자리에 앉혀 놓은 가족과 친구들이 준 역할도 충실히 해낼 수 있겠다 한다. 함께 글을 쓰며 성장하고 있는 브런치 안의 여러 작가님들과의 동료역할도 충실히 해내고 싶다. 그래서 부족하고 부끄러운 글이지만 금요일 이면 어김없이 글을 쓰는 것이다. 나 역시 용기 내서 쓰고 있다고, 계속해보겠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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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