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보던 꽃인데 유달리 예뻐 보이는 날이 있다. 매일 지나가는 길목에 자라는 나무들이 경이로울 때가 있다. 장님처럼 아무것도 보지 못하다가 공양미 300석에 몸을 판 심청이를 딸로 둔 심봉사처럼 갑작스레 눈이 떠지는 기적을 마주할 때가 있다. '이 꽃이. 이 나무가 이렇게 예뻤나? 그동안은 왜 몰라봤을까?'란 의무문을 만들어 내고 이제라도 알게 되어 다행이라 여기며 휴대폰을 꺼내 내가 본 것을 그대로 담을 수 있길 기대해 본다.
해가 바뀔 때마다 봄은 왔고, 여름이 오면 그 기세에 밀려 떠나가곤 했다. 쉰 해를 살면서 쉰 번째 봄을 마주하는 중이지만, 이런 봄은 또 없었다. 날짜도 오는 모습도 달렸던 봄. 꽤 긴 시간 봄을 모르고 살았다. 늘 찾아왔을 봄이었을 텐데 인생의 봄날이 다 사라진 듯 못 보고 지나간 해가 몇 년이나 될까? 헤어리기엔 멀리 잊힌 날들이 많다. 어느 해 기적처럼 봄이 눈에 들어왔고, 그 찬란한 생명의 탄생을 일일이 목격하고 하루가 다르게 피는 꽃과 나무의 작은 잎싹들을 놓칠세라 휴대폰에 담아두고 가두고 그들의 성장을 붙잡아 두는 일에 열을 올렸던 날들도 있었다. 그랬던 마음이 다시 시들해지고 '봄이네..'시쿵둥 지나친 한 해가 또 찾아오긴 했지만 찬란한 봄을 발견했던 날의 기억 때문인지 봄을 잊는 일은 없었다. 맨 처음 피는 산수유는 늘 반갑고, 몽오리진 목련의 짧은 생은 안타깝다. 노란 개나리의 명랑함 때문에 기분이 좋고, 산에 피는 진달래는 우아하다. 발 밑에 수북한 민들레의 강인함과 네 잎 클로버를 선물하는 작은 잎들의 파릇함이 싱그럽다. 생명이 주는 아름다움과 살아 있음에 감사함을 품게 하는 봄이 있어 다행이라 생각한다.
희미하게 밝아지는 나뭇가지나 그 후에 일제히 움트는 어린잎이 아름답다는 사실, 동시에 그것들이 당연히 거기 있다는 사실에 새삼스럽게 놀랐다. 당연하면서도 기적 같았다. 분명 내가 깨닫지 못했을 뿐이지 세상 모든 곳에 아름다움이 숨어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아름다움을 깨달았다. 예를 들어 방과 후 고등학교 체육관에서. 피아노가 어딘가에 녹아든 아름다움을 꺼내어 귀에 들리게 해주는 기적이라면 나는 기쁘게 피아노의 종이 되리라.(양과 강철의 숲, 미야시타 나츠)
아름다움이란 원래 존재하는 것일까? 발견되는 것일까? 플라톤이 말한 이데아란 진실로 보편적인 것일까? 그런데 어째서 장미꽃을 아름답다 여기는 사람과 별로라는 사람이 있은 것일까? 약자를 보호하고 지켜야 하는 논리는 왜 이해관계에 따라 달라지는 것일까? 아프고 고통받는 이들에게 주는 나라의 최저생계비가 건강한 사람이 받는 월급과 비슷하면 시기하고 화를 내는 사람은 왜 있는 걸까? 어릴 적부터 믿었던 선의 세계와 진실과 정의가 이기는 세상은 실제로 우리의 눈이 무엇을 보고 있냐에 따라 크게 달라지는 어른의 세계로 들어온 나는 절대적이고 보편적이라 믿었던 진리의 존재가 의심스러워졌다. 꽃과 나무를 봐도 아름다운지 모르겠다 말하는 이를 처음 만났을 때의 놀람은 그는 틀리고 내가 옳다고 여기는 자만을 심어 주기도 했다. 한동안 그런 사람은 멀리해야 한다 여겨 피해 다녔지만, 지금은 다시 잘 만나고 있다. 우리가 생각하는 아름다움은 식물의 다양성만큼이나 달랐다. 정의라 믿었던 것들 진실이 승리한다는 멋진 말들이 얼마나 오염되기 쉬운 인간의 언어인지 알게 되기까지도 오래 걸렸다. 인간이란 종족이 호모 사피엔스로 비롯되었다고 하지만, 우리의 피 속엔 네안데르탈인의 DNA도 있다고 하니 아마도 자기만의 세상, 타인과 동화되지 못한 사적이고 비밀스러운 동굴을 누구나 하나쯤은 가지고 있지 않을까 싶다. 감히 상상하건대 그건 네안데르탈인의 DNA에서 왔을 테다. 인간보다 똑똑했지만 아름다움의 실체 같은 걸 믿지 못했던 그들이니까.
아름다움이 사적으로 발견되는 것이라 결론 내린다면, 누구도 알아보지 못한 아름다움을 오직 나만 발견해 낼 가능성도 있을 테다. 자연 안에서, 책 속에서, 문장들 가운데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음악을 감상하며, 그림을 통해서, 무언가를 바라보는 진지한 시선과 타인을 위해 흘리는 눈물과 오래되고 낡은 풍경 안에서 까지. 발견할 수 있는 아름다움이야말로 그것을 볼 수 있는 눈만 있다면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러니 세상 속 가득한 아름다움을 보는 눈을 키우는 일에 시간을 쓰자. 인생을 쓰자. 물론 그것이 당신을 부자로 만들어줄 일은 전혀 없겠지만, 쉽게 지치고 상처받고, 스스로가 미워지는 엉터리같은 인생에서 버틸 힘은 되어 줄 테니까. 눈에 보이지 않는 균류가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을 돕고 있듯이 혼자 발견한 수많은 아름다움이 각자의 인생을 조용히 돕고 있지 않을까? 믿어지지 않는다면, ' 나는 자연인이다' 시청을 권하겠다. 그들이 발견한 아름다움이 어떻게 힘이 되어주는지 확인할 수 있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