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의 티타임과 <당신 인생의 이야기>에서 이어진 공상
뜨거운 물에 잠긴 티백에서 흩어져 나오는 색채를 본다. 휘휘 티백을 돌려주면 그 빛깔이 투명의 물을 만나 점점 옅어지며 색이 섞이는 것도. 그것이 내가 아침마다 처음 보는 풍경이다.
지난밤 잠을 청하려 불을 끄고 누웠는데 갑자기 엄마의 잔소리성 구박하는 목소리가 떠올랐다. 엄마가 내게 자주 하는 말투인데, 그 말을 하는 엄마를 눈앞에서 보기에는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이 순간적으로 실감이 났다. 그것이 왜 어제 잠에 들려고 할 때 생각이 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제는 테드 창의 소설 <당신 인생의 이야기>를 다 읽었다. 예전에 직접 책을 빌렸다가 영화 <컨택트>의 원작인 단편만 읽고는 기한이 되어 미처 다 읽지 못하고 반납해야 했는데, 먼 이국에 와서 이제야 이 책을 다시, 그리고 한 문장 한 문장 음미하며 읽었다.
경험한 것을 쓰는 것은 기억력을 헤집으면 될 일이다. 경험하지 않은 미래의 일을 쓰는 것은, 그러니 얼마나 많은 공상과 이해와 질문이 필요하겠는가. 따지고 보면 내가 장차 쓸 논문도 그런 성격이 아예 없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고. 여러 흥미로운 문제제기가 많았지만 논문의 방향성과도 이으면 재미있겠다 생각했던 문제는, 자유의지와 미래를 아는 것이 양립할 수 있냐는 것이었다. 우리는 미래를 알지 못한다는 시간에 관한 물리학적 한계 때문에 자유의지가 중요하며, 반대로 미래를 지금 알 수 있다면 미래란 반드시 일어나야 한다는 법칙에 따라 운명처럼 정형화되는 셈이니 자유의지는 의미를 잃는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일어날 일을 안다고 해서 나의 선택은 그저 그것을 강령처럼 따라가야만 할 뿐인가? 모든 것이 인과의 법칙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처음 어떤 동작을 할 때부터 결과를 알고 발걸음을 내딛는다면? 마지막 문장을 이미 알고서 알파벳을 쓰기 시작한다면? 이것을 우리가 지금까지 아는 인과법칙 내에서는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설명할 수 없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정할 수 없다. 이미 일어난 여러 역사적 선례를 보아도 그렇다. 그렇기에 이러한 공상 역시 어쩌면 의지와 미래에 대한 앎이 양존할 수 있다는 실마리가 아닐까. 결정이니 비결정이니 하는 것도 결국 인과의 프레임 안에서의 이야기일 뿐이다. 이것을 어떤 특수한 지각능력보다는 오히려 규범과 연결 지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나름의 상상의 나래를 급하게 펼쳐 보았던 것이다.
아이디어는 우연에서 오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우연의 몫만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수많은 습관들이 쌓여 마치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일상이 되었을 즈음 불쑥 나타나는 것이라 언뜻 보아서는 우연 같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유레카를 외치며 깨달음을 얻은 아르키메데스가 그 깨달음의 원천을 알게 된 실마리도 너무나 일상적인 행위에서였으니 - 어쩌면 평소의 차곡차곡 그려왔던 여러 점들이 하나의 긴 직선이 되어 그 발견을 도와준 다리를 놓아주었을 것이다. 이런 생각이 들면서, 아니 본능적으로 나는 언제부터인가 수집을 하고 그것을 기록하면서 이것이 나의 다리가 되어주기를 열심히 상상했다. 어제의 책에서 빌려온 생각들도 이러한 과정에 더해지는 하나의 또 다른 점일 것이다.
그러니 혹자가 몇십 년 후의 모습을 떠올려보라 한다면 무엇이 되어 있을지는 모르나 이렇게 여러 매체나 수단을 통해 접한 문구나 사상을 그때에도 여전히 채집하고 있으리라는 것은 확신할 수 있다. 마치 무한히 솟아나는 곤충을 영원히 잡고 기록하고 다시 놓아주는 일을 반복하는 것과 다름없겠지만, 그리하여 가끔은 안팎의 여러 소음에 정신이 희미해져 흘러가는 괜한 나뭇잎을 나비라 착각할지도 모를 일이지만 그 역시 내 전부 중 조악한 몇몇 사건들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오늘은 어떤 것을 채집할 수 있을까 하는 마음으로 주변에 놓인 사물들을 응시한다면, 그럭저럭 하루의 소요를 지나 보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외국체류 시작 (2021. 9. 17. ~)으로부터 +293일.
브런치북 첫 연재일로부터 +6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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