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살아남아야 해.
독일에서는 Sommerzeit라 부르는 서머타임이 새벽부로 끝나고 1시간이 앞당겨졌다. 아침은 비교적 빨리 밝아짐을 느끼지만 이제 오후 4시만 되어도 어둑해지리라. 하루에서 어두운 시간이 절반 이상이 되어서, 이곳에서의 겨울은 유독 더디게 흐르는 듯하다.
어제저녁은 간만에 혼자 보낸 시간이었다. 너무 오랫동안 한 사람과의 시간을 위해 나를 위한 시간을 매번 미뤄두지 않았나 반성한다. 김이 슬며시 올라오는 차를 마시며 (데엠*에서 새로 출시된 것이라고 온갖 허브가 섞인 차였는데 나름 먹어볼 만하다) 어제 잠깐 커피타임을 함께 가진 J가 추천해 준 아르놀트 쇤베르크(Arnold Schönberg) 작곡가의 정화된 밤(verklärte Nacht)을 듣는다. 밖은 안개가 짙게 깔려 있어 밖으로 나가 아침운동을 할까 망설이게 된다. 멀리서 볼 땐 신비롭고 저 안으로 들어가면 내가 감추어져 오히려 자유를 느낄 수 있을 것만 같은데 막상 나가 안갯속에 들어가면 안개라 해도 다를 바 없이 모든 것이 지나칠 정도로 잘 보여 실망할 것이다. 이 글을 다 쓰면 일주일 내내 나의 고단한 몸을 감싸 주느라 역시 지쳤을 이불을 밖으로 들고나가 털어야겠다. 방이 건물 출입문 가까이 있어 가능한 일이다. 이렇게 이불을 일요일 아침마다 구태여 밖으로 들고나가 털어내는 것은 이곳에 와서 꾸준히 하고 있는 루틴이 되었다. 더불어 물론 지금 지내고 있는 방보다 면적이 넓은 데다 주방이 달려 있는 방이 나온다면 고민 없이 들어갈 테지만, 이처럼 이 방이 주는 장점도 있기 마련이다. 아파트먼트는 쉽게 나지 않으니 그전까지 이 방의 장점을 충분히 누려야겠다.
어제 한 주간 돈을 또 얼마나 흥청망청 썼는지 자기반성을 위해 계좌를 확인하는데 마침 슈페어콘토(Sperrkonto)**로부터 한 달 치가 다시 입금이 되어 있다. 슈페어콘토에서 이체되는 것은 지난달이 마지막이라 날짜를 잘못 계산한 까닭에 부모님이 미리 보낸 생활비까지 합쳐져 상당한 금액이 더해진다. 어린 시절부터 풍족하게 살아온 것은 아니지만 돈이 수중에 있으면 좀체 아끼지 못하고 그에 맞춰 소비의 폼을 넓히는 못된 성정이라, 이 돈을 두 달간 쓸 작정을 가지고 현명한 소비를 하리라 다짐한다.
스트레칭의 중요성도 느낀다. 매일 아침마다 해오던 간단한 동작들을 요 며칠간 건너뛰어서인지 아니면 그저께 홈트레이닝으로 한 동작에 어깨와 목에 무리가 가는 자세들이 있었던 건지 특히 목의 통증이 지속되고 있다. 글을 쓰고 나서 할 일이 이렇게 추가된다.
몸에 대해 한 마디를 더 얹어야겠다. 지난주부터 하루 세끼를 꼬박 - 그것도 양도 평소보다 더 많이 먹고 날씨가 쌀쌀해졌다는 이유로 소화겸 나섰던 산책도 멈추었으니 거울을 통해 반사된 몸은 당연지사 부어있다. 이러한 내 몸을 나보다 더 자주 들여다보고 쓰다듬어 몸의 변화를 더 빠르게 알아차릴 법도 한 C는 자신은 원래 마른 몸을 좋아하지만 요즘은 나처럼 근육이 없고 맨살만 있는 몸이 좋아졌다며 급기야 아예 내가 통통해진다면 더 귀여워질 것 같다고 웃으며 달래주기는 하지만, 그가 어떻게 생각하는지와 별개로 내 몸에 대한 감상은 나 스스로의 자기만족에 가까워서 가령 옷을 입을 때 평소에는 끼지 않았는데 붙는다거나 반대로 딱 맞았는데 헐렁하거나 하면 거기서부터 기분이 좋아지지 않는 것이다. 아침은 빨리 오고 저녁은 길게 느껴지는 까닭에 깨어 있는 하루가 늘어나면서 늦잠을 자면 자연스레 충족되었던 16시간 공복을 이제 지키지 못하는 것도 있으리라. 그렇지 않아도 수업을 제외하고 평일엔 늘 방에만 박혀 있으니 주말에는 밖으로 나가 내가 안락함을 느끼는 세이프 존을 조금씩 넓혀야 한다는 세간의 말을 지키려 했지만 나가면 분명 더 먹을 테니 자중을 해본다.
요즘에는 영 한국 뉴스를 보지 않는지라 몰랐다가, 한국 친구들로부터 소식을 들었냐며 단체 메시지방이 어수선해진 데다가 어학원을 함께 다닌 친구 D에게도 서울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거냐며 묻기에 황급히 기사를 찾아봤다. 믿기 힘들 정도로 비현실적이고 너무나 참혹해서 기사에 담긴 활자를 똑바로 마주하는 것조차 힘들었다. 지금의 시대에 이러한 참사라니. 누구도 살아가며 상상하지 않았을 죽음의 형태를 여러 단어로 전달되어 있는 글자들이 여러 감정과 생각을 낳는다. 코로나 이후 오랜만에 개방된 현장을 즐기려 한, 적어도 그 분위기를 3년 만에 찾고자 한 이들이었을 텐데 그 누구에게도 책임이 없어 더 마음이 아프다. 오랜만의 이벤트라 인파가 몰릴 것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을 테니 최소한의 구조라인은 조성해두었어야 했다는 문제제기도 가능하겠지만, 명확한 행사가 등록되었던 것도 아니었고 자발적으로 그저 이태원을 찾아 좁고 경사진 길을 친구와, 혹은 친구와 만나기 위해 지났을 뿐이라 최소한의 정도라는 것도 기실 불분명하리라. 특히나 혼란스러운 인산인해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바로 옆에서는 시끄러운 노래를 들으며 오랜만의 해방감을 느끼고 있었을 사람들의 공존이 너무 기묘해서 말을 잃게 되는 것이다. 공포란 이럴 테지. 누구의 잘못도 없고, 어찌할 수 없었던 재해는 분노보다는 허무를 느끼게 한다. 파친코의 대사가 가만히 자리 잡는다. <삶은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일 투성이니까. 그럼에도 살아남아야 해.> 하지만 살아남지 못한 이의 넋은 대체 어디로 간단 말인가.
* 데엠(dm): 독일의 유명 드럭스토어.
** 이른바 동결계좌로, 독일에서 특히 학생으로서 비자를 받기 위해 재정을 증빙하는 용도로 개설한다. 예컨대 1년 이상의 비자를 받기 위해서 최소 1년간의 생활비를 보유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외국인청에서 제시하는 금액을 계좌에 묶어두어 한 달씩 정한 금액이 본인 사용 계좌로 빠져나가게끔 한다.
외국체류 시작 (2021. 9. 17. ~)으로부터 +408일.
브런치북 첫 연재일로부터 +67일.
주의사항: 언제 이 체류가 종료될지는 모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