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가본 곳
오, 그자가 입을 벌리면 | 김지혜 지음
이미 가본 곳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옷가게에서 미친 듯 옷을 고르고 있었네 옷을 고르는 내 열 손가락은 락스에 담갔다 꺼내놓은 행주처럼 창백했네 도마뱀 꼬리처럼 푸르스름한 핏줄이 도드라졌네 그곳은 각종 브랜드와 명품이 층층마다 발광하는 고층 백화점이 아니었네 깜짝세일 방송이 천지 사방에서 터져 나와 귀청을 때리는 이마트가 아니었네 박쥐 같은 옷가게였네 귀찮게 따라붙어 치수를 묻는 여직원 따위는 없었네 란제리 가게처럼 은근하지도 모피 매장처럼 화려하지도 않았네 한 치 앞이 불가해한 동굴이었네 거꾸로 매달린 종유석의 옷들만 즐비했네 동굴에 걸려 있는 옷들은 언제 어떻게 내 눈을 찌르고 날아갈지 모르는 박쥐였네 박쥐와 더불어 경계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인간들이 시루에 담긴 콩나물처럼 빽빽이 둘레를 치고 있었네 인산인해였네 그곳은 자꾸만 팽창하는 곳이었네 언제 어디서 몰려와 어디로 어떻게 팽창하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네 옷을 고르는 사람은 나뿐이었네 나는 옷을 골라야만 하는 순번이었네 그러나 어떤 옷도 내 것이 아니었네 아무리 뒤져도 나의 냄새, 나의 사상, 나의 노래들은 보이지 않았네 온몸의 모세혈관이 천천히 식어가고 있는 게 느껴졌네 나는 경악을 금할 수 없었네 내게 허용된 단 한 벌의 옷을 골라 입기 전에는 결코 빠져나갈 수 없는 세계에 나는 갇혀버린 것이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