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진짜 토요일
서울역에 갔다. 청첩장 모임하러 온 중학교 친구 ㅅ이 내려가기 전에 나에게도 주겠다며 잠깐 얼굴 보자고 서울역에서 보자고 했다. 기차를 안 타는데, 마중이 아닌데 서울역을 간 건 처음.
청첩장에 포스트잇을 붙여줬다. 우리는 고등학교 때 싸이월드 공유 일기를 쓰던 친구로서, 지금은 딱히 비밀이 아니나 그때는 중요한 비밀이었던, 그렇지만 누군가 딱히 알아내려고 하지는 않았을 비밀이 이 날의 포스트잇에도 있었다. 그러니까 이게 무슨 말이냐면, 그때 내가 짝사랑했던 애의 별명이 들어 있었다.
'그때 우리 카카오 이야기도 하고 그랬는데.'
카카오는 우리만 아는 그의 애칭이었다. 파리크라상에서 보기로 했는데, 그래서 라떼 마실 생각으로 갔는데—파리크라상은 라떼가 맛있다— 자리가 없어서 빈스앤베리즈로 갔다. 몰랐는데 서울역 내에 빈스앤베리즈가 1호점과 2호점, 2개가 있다.
ㅅ을 보내고 지하철 가는 길, 하늘이 너무 맑다. 서울을 동경하는 고등학생으로 왔을 때는 저기 wework가 없었는데. 과거의 사람이 되어 간다. 나쁘지 않다. 어릴 땐 어른들의 과거에 영광이 있었으리라 생각하지 못했는데, 아직은 빠르게만 지나가지는 않는 나의 얕은 과거에는 영광이 있다. 어른들도 그랬을 것이다.
집에 가면 다시 나오지 않을 것 같아 서울역 갈 때 운동복을 미리 챙겨갔다. 왜냐하면, 헬스장은 우리 집에서도 지하철을 타고 가야 하는 곳에 있으니까. 어차피 지하철을 타야 하는 김에 서울역에서 바로 헬스장으로 향했다. 내가 다니는 헬스장 위치는 장 보기에 매우 최적화돼 있다. 운동하고 낙지 사가는 게 이상하지 않다는 뜻이다.
ㄷ이 친구들이랑 놀러 가서 혼자 있는 토요일. 원래 가끔 혼자 있는 시간을 즐기기도 하고, 요즘 통 문화생활에 목이 마른 중이기도 해서 영화를 한 편 보기로 한다. 제목은, 어쩌면 우린 헤어졌는지 모른다.
영화관 팝콘을 좋아하는데 영화관을 안 간지 오래되어 못 먹고 있던 어느 날 마트에서 팝콘을 샀다. 영화 보는 날 먹겠다고. 마트 팝콘 말고 영화관 팝콘 사 오기는 글쎄, 그 카라멜 팝콘의 칼로리가 주는 죄책감을 감당하기가 싫다. 뭐, 마트 팝콘이라고 크게 다르겠냐마는. 아무튼 샀는데, 그걸 산지도 오래되어버렸다. ㄷ과 나는 꽤나 건강한 삶을 살고 있는데 ㄷ은 더 깨끗한 식단을 선택하는 편이라 내가 먹고 싶어 할 때마다 주로 나를 뜯어말렸다. 그러나 심판 없는 토요일이 왔고, 이 날을 칼로리 플렉스 데이로 정했다. 팝콘을 먹기로 결심했고, 굳이 캔맥주도 한 캔 땄다. 요즘 술도 잘 취하는데. 집에 멀쩡한 맥주는 없고 세 캔 샀는데 내 취향이 아닌지 맛없어서 안 먹고 남아 있는 저 버터맥주만 있어서 저걸 땄더니 역시는 역시다. 맛없다.
그래서 이번엔 고추참치를 땄다. 그러니까, 팝콘이 뵈르를, 뵈르가 고추참치를 불러왔다. 어느 것 하나 다 먹지 못했는데, 아까 마트에서 사 온 낙지를 많이 먹었는지 소화제를 먹었다.
영화의 내용은 그거다. 연인이 헤어지는 건 언제일까. 헤어지자고 말했을 때? 이미 끝이 났는데 상대가 먼저 헤어지자고 말하길 기다릴 때? 다른 연애를 시작했을 때? 두 사람이 모두 다른 연애를 시작했을 때? 여지처럼 남긴 물건까지 다 주고받았을 때? 연락처를 삭제했을 때? 카톡을 차단했을 때? 차단도 숨김도 아닌 삭제를 했을 때?
언제라고 생각하시나요?
친구들과 만나고 돌아온 ㄷ과 이번엔 우리 둘의 일상을 향유한다. ㄷ은 피아노를 치러, 나는 가벼운 작업을 하러. 테이블이 낮았지만 오래 있진 않아 목이 아프진 않았다.
야근하고 퇴근하는 지하철, 두 명이나 날 밀치고 지나가 불쾌한 마음을 잊어볼 겸 지난 토요일을 되새긴다. 서울역에 갔다가 낙지볶음을 먹고 영화를 보며 팝콘과 맛없는 맥주와 소화제를 먹은, 하고 싶은 걸 다 해버린 어느 토요일이 꽤 괜찮은 장면인 것도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