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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셴도는 언제나 내 마음대로 오지 않는다

by 노미화

그런 글을 좋아했다. 변주가 확실한 글.


음악에 대해서는 문외한이다. 그저 어릴 적 피아노건반을 조금 두드려봤다는 이유로, 이제 막 연주회 몇 번 나간 아들에게 “그 부분은 크레셴도로 해야지”라며 전문가처럼 말하는 나. 전문가도 아니면서.


잔잔하고 은은한 구성의 곡처럼 그와 비슷한 글도 그 나름의 감흥이 있지만, 나는 확실히 구조와 형식에 있어서 변형과 파괴를 담은 글에 더 끌린다. 인생 고난과 역경의 대서사시와 같은 ‘내용’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사소한, 별것 아닌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도 관점이 유연하게 흐르고, 강약과 템포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사유가 전개되는 글. 마치 음악의 변주곡처럼.


그러니까, 감정과 사유가 일정한 선율을 유지하지 않고, 어느 순간 갑자기 꺾이고 솟구치는, 그런 흐름.


문득, 영화 <이터널 선샤인>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기억이 지워지는 과정의 이야기가 일반적인 내러티브의 선형 구조를 따르지 않는다. 마치 파도처럼 갑작스레 꺾이고 솟구치며 영화는 진행된다. 모든 기억을 지워가는 와중에도 조엘은 마지막 순간 이렇게 말한다.

"이 기억만은 남겨줘."

조엘의 내면에서 요동치는 감정과 파편화된 기억들. 처절한 이별의 슬픔에 잠기다가도, 곧이어 아름다웠던 첫 만남의 따뜻함에 휘말리는 식으로, 감정선이 예측할 수 없이 변화한다. 그에따라 나의 감정도 변주된다. 더 생생하게 몰입된다. 아무리 지우려 해도, 감정은 다시 다른 얼굴로 되살아난다. 같은 사랑, 다른 감정, 같은 기억, 다른 해석. 그들은 결국 같은 관계를 또다시 반복한다. 반복이면서도 같지 않은. 그 자체가 변주가 된다.



그럼 나는 왜 그런 형식에 끌릴까. 잔잔하고 ‘안전한’ 구조보다는 사유의 흐름이 예측할 수 없는 '의외의' 전개에 매력을 느낄까. 아마도 생각지도 못한 글의 전개가 주는 감정의 진폭이 크기 때문일 것이다. 마치 롤러코스터의 급경사 부분처럼 감정이 뚝 떨어지는 혹은 심장이 붕 뜨는 느낌이랄까. 변주는 어쩌면 나의 내면의 혼란과 불완전함을 긍정하는 방식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쓰는 에세이에도 변주가 가능할까. 글쎄다.

읽는 것과 쓰는 것은 괴리감이 있다. 왜냐하면, 나는 그렇게 써지지가 않기 때문이다. 너무나 당연한 이유이겠지만, 크레셴도는 언제나 내 마음대로 오지 않는다. 국문 전공자도, 음악 전공자도 아닌 내가 변주가 확실한 글을 쓰고 싶다는 말이 어쩐지 조금 가소롭다. 하지만 조엘도 결국 다시 사랑을 시작했다. 어차피 가소로워진 거, 조금 더 뻔뻔하게 변주해 본다. 그 가소로운 마음에서부터 예측 불가능의 글이 시작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희망을 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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