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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火편한 동승자

by 글풍뎅이 Apr 05. 2025

 

 운전석 옆 창문이 내려간다. 상대편을 향해 욕설이 튀어나오기 일보 직전이다. 조수석에 앉은 나는 불안한 마음이 든다. ‘제발. 그냥 지나가자'. 하지만 이미 두 운전석 남자들의 입과 눈에는 불꽃이 일기 시작한다. ‘별것도 아닌데 그냥 지나가면 되지. 왜 저렇게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에게 화를 낼까.’라는 이성이 감각들을 진화시키려고 노력한다. 곧 내려서 싸움이라도 할 것 같던 그 기세는 어디로 가고 운전석의 창문이 올라간다.      


“아놔. ㅆ.. 뭐 저런 새끼가 다 있어”     


 창문도 올라간 마당에 그 말을 듣고 있는 건 온전히 나였다. 상대방은 듣지도 못하는데. 당연히 아닌 것을 알면서도 진화가 덜 된 남편의 불씨가 자꾸만 나에게로 오는 것 같아서 기분이 영 언짢았다.     


“나가서 싸우던가.”      


 나는 남편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남편은 그런 내가 이해가 안 되는 얼굴이었다.           



‘이성은 감각들의 증거를 날조하도록 만드는 원인이다. 감각들이 생성, 소멸, 변화를 보여 줄 때, 그것들은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라고 니체가 말했다. 나는 문득 생각한다. 감각이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면, 그 순간 내가 느낀 불안, 분노, 불쾌감은 무엇에 대한 진실일까. 평화로운 '이성'으로 전혀 평화스럽지 않은 '감정'들을 죽이는 것이 더 나를 불편하게 하는 것일까. 남편의 분노가 아니라 그 분노의 불씨가 나에게 튄 것이 문제였을까. 분명한 건 차 안을 가득 메운 공기가 많이 달라졌다는 것이었다.    


 창밖으로 날려버린 듯하지만, 나는 그 말의 파편을 고스란히 안고 있다. 왜 우리는 늘 가장 가까운 이에게만 이런 찌꺼기를 남기는 걸까. 사랑하니까? 익숙하니까? 아니면, 그냥 편하니까? 나는 그 편함 속에서 점점 쪼그라드는 내 감정을 더듬는다.                



 화가 많은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큰 목소리는 언제나 나를 얼어붙게 했다. 분노는 집안 곳곳에 공기처럼 스며들곤 했다. 밥상 너머로 튀어나오는 짜증 섞인 한마디, 거실 한구석에서 들리는 깊은 한숨, 표정 없는 얼굴들. 그 속에서 자랐다. 조용히, 최대한 소란이 일지 않게, 누군가의 화를 불러일으키지 않도록 행동했다. 누군가 소리를 지르면 그 화가 나를 향하지 않았더라도 나는 움츠러들었다. “왜 이렇게 예민하냐”는 말을 들었고, “그냥 넘겨”라는 충고도 많이 들었다. 하지만 나에게 온 불씨는 사라지는 게 아니었다. 그때도 지금도. 흩어지고 흩날려서 마음 여기저기에 불씨를 남겼다. 지금까지도.         

      



“미안해, 그런데 당신한테 화낸 거 아니야. 신경 쓰지 마”


 그의 화는 지나가겠지만, 나의 감정은 아직 어딘가에 걸려 있다.  신경을 쓰는 건 나의 오래된 습관이라는 걸. 소리 지르는 사람보다, 그 공기를 감당해야 했던 사람에게 더 깊이 새겨지는 흔적이 있다는 걸. 그리고 오늘도 나는 조용히 그 흔적을 더듬으며, 내 안으로 들어온 불씨를 끄기 위해 노력한다는 걸.   나는 대답하지 않고 창문 밖만 쳐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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