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사교육을 하는 사람이다. 강의실 안에는 그야말로 어른사회의 축소판과 같다. 조금 더 솔직한 축소판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다. 어쩌면 가식과 거짓으로 진실마저 왜곡되는 어른의 사회보다 훨씬 솔직한 사회라고 생각할 때가 더 많은 것 같기도 하다.
“우아! 잘했네.”
“선생님, 그렇죠! 아, 난 역시 천재야.”
(천재님, 틀린 문제였잖아요. 처음부터 제대로 푸셔야죠.)
“글씨가 이상해서 채점을 못 하겠어. 00아, 시험을 칠 때도 이렇게 적으면 오답일 것 같은데?”
“선생님, 저 학교에서는 잘해요. 실전에는 강해요.”
(태도가 곧 실력이다. 고객님, 일단 똑바로 앉고, 글씨 좀....)
“네가 푸는 방식도 좋은데, 이런 방법도 있어. 여기 봐. 설명해 줄게.”
“선생님, 어차피 답만 맞으면 되는 거 아니에요?”
(문제 꼬아내면 못 풀잖아, 통밥으로 풀지 마 제발.)
강의실에서 오가는 대화를 보면, 이곳이야말로 인간 사회의 원형이 아닐까 생각하곤 한다. 어린아이들이라고 해서 무조건 순수하거나 정직한 것도 아니고, 어른들이라고 해서 꼭 거짓과 가식에 찌든 것도 아니다. 다만, 강의실 안의 아이들은 솔직함을 포장할 줄 모르고, 어른들은 솔직함을 숨기는 데 익숙하고 능숙할 뿐이다.
교실 한쪽에서는 꼬마 현자가 조용히 문제집을 펴고 문제를 푼다. 설명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대답도 열심히 한다. 눈빛이 반짝인다. 모르는 것이 있으면 조용히 손을 든다. 때로는 틀리기도 하지만, 그것을 배우는 과정이라 여기고 개의치 않는다.
다른 한쪽에서는 꼬마 군주가 자리하고 있다. 그는 손을 들 때조차 당당하다. 수업 분위기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큰 목소리로 주위의 시선을 끈다. 집중해서 풀고 있던 아이마저 그 당당함에 이끌려 그 아이를 쳐다본다. 꼬마 군주는 자신의 답이 정답일 거라 믿고, 만약 틀렸다면 문제 자체를 탓하거나, ‘그건 배우지 않아서 내가 풀지 못했노라’ 변명한다. ‘이미 배운 내용이다’라는 말도 ‘자신은 기억이 없다’라며 당당하다. 누군가 자신보다 먼저 정답을 이야기하면 살짝 인상을 찌푸리지만, 대놓고 표출하지 않는 태도를 보인다. 하지만 누가 봐도 기분이 나쁜 표정이다.
“선생님, 저는 이 방식이 더 좋아요. 이렇게 푸는 게 더 빠르잖아요.”
꼬마 군주는 자기에게 익숙한 방법을 고수한다. 나의 설명을 듣는 둥 마는 둥 한다.
“맞아, 네 방법도 괜찮아. 하지만 이 방식이 더 효율적일 수도 있어.”
“전 제 방식이 더 좋아요. 답은 맞잖아요.”
그 옆에서 꼬마 현자는 가르쳐준 다른 방법을 조용히 따라 풀어본다. 그리고 질문한다.
“풀었어요. 이렇게 풀어도 되네요. 그런데, 왜 이 방법을 알아야 해요? 왜 그런 거예요?”
배움에 대한 태도는 참 다채롭다. 누군가는 고개를 끄덕이며 낯선 개념을 받아들이고, 누군가는 끝끝내 고개를 젓는다. 자신이 틀렸다는 걸 받아들이기 싫어하는 마음, 모르겠다는 걸 인정하는 데 시간이 걸리는 사람도 있다. 강의실은 그런 마음들이 부딪히고 스며드는 곳이다. 조용히 눈빛만 굴리는 아이, 관심 없는 척하지만 은근히 듣고 있는 아이, 입술을 꾹 다문 채 실수와 씨름하는 아이, 다른 친구와의 비교로 주눅이 드는 아이. 작은 칭찬 한마디에 붉어지는 귀, 스스로 친구와의 비교에 축 처진 어깨, 그러거나 말거나 모든 게 귀찮은 듯한 무기력한 표정까지. 그 모든 얼굴들이 모여 강의실을 채운다. 작은 공간 안에 정말 다양한 인간 군상이 모인 작은 사회가 들어서 있는 셈이다. 어른의 사회도 다르지 않다. 내가 어떤 태도를 가지느냐가, 결국 내 모습을 결정짓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틈에서 문득, 나는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일까 궁금해진다. 꼬마 군주처럼 세상 다 아는 척하고 있을까? 아니면 자기 확신에 찬 얼굴일까? 그 도 아니면 그저 조용한 관찰자 혹은 구경꾼. 웃다가, 조용해졌다가, 또 뭔가에 꽂혀서 갑자기 손을 드는 그런 사람일지도. 어쩌면 그날그날 달라지는 또 다른 누군가 일지도. 중요한 건 고정된 역할이 아니라, 변화할 수 있는 마음가짐일지도 모르겠다.
겸손이란 결국, 내가 가진 틀이 '삐뚤 할 수도 있다'는 걸 받아들이고 다시 연장을 들어 고칠 수 있는 것. 나의 틀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배울 수 있는 여지를 두는 것이 아닐까. 비워내야 하는 찻잔처럼.